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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규철 : ET 할아버지, 한국의 모세로 불린 대안교육의 선구자

by 지식한입드림 2025. 9. 3.

채규철(蔡圭哲, 1937~2006)은 '이티(ET) 할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더 널리 알려진 대안교육 운동가이자 사회복지 선구자다. 그는 한국 최초의 민간의료보험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으며, 두밀리자연학교를 통해 대안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극심한 화상으로 인한 외모 변화에도 굴복하지 않고 평생을 가난한 이웃과 아이들을 위해 헌신한 그의 삶은 진정한 휴머니스트의 모범을 보여준다.

출생과 어린 시절

채규철은 1937년 10월 10일 함경남도 정평군 고산면에서 아버지 채종묵(蔡鍾默)과 어머니 김죽순(金竹荀) 사이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부 채동주(蔡東胄) 대부터 개신교를 믿기 시작했는데, 조부는 순회 전도사로 일하며 각지를 돌아다녔다.

 

부모님은 모두 신교육을 받은 인텔리였다. 아버지 채종묵은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어머니 김죽순은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녔으며 둘 다 신학대학을 졸업했다. 채규철이 태어나던 당시 아버지는 고산면사무소에서 근무하다가 1938년 조선총독부 3종 훈도시험에 합격해 신북청소학교 훈도로 발령받았고, 1939년에는 함흥 영생소학교에 부임했다. 1945년 소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전도사로 전업했다.

6·25 전쟁과 월남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채규철 가족은 월남하여 통영군 일운면(현 거제시 일운면)에 정착했다. 일운면 지세포리에 위치하던 대광중학교 지세포분교를 졸업하고 거제고등학교에 입학해 1년을 다녔으나, 2학년 때 상경하여 대광고등학교에 전학해 졸업했다.

풀무학교에서의 시작

이후 농촌운동에 뜻을 두고 서울시립농업대학(현 서울시립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해 졸업한 뒤, 1961년 충청남도 홍성군의 풀무학교에서 정규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풀무학교는 일제강점기부터 농촌계몽운동을 펼쳐온 대안교육의 선구적 기관이었으며, 이곳에서 채규철은 교육을 통한 사회변화의 가능성을 체험했다.

덴마크 유학과 협동조합 운동의 영향

1965년 덴마크로 유학하여 하슬레브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채규철은 국민고등학교 운동과 협동조합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덴마크는 19세기 말부터 농민들의 자발적 교육운동인 국민고등학교(Folk High School) 운동이 활발했으며, 협동조합을 통한 상부상조 정신이 깊이 뿌리내린 나라였다.

 

특히 그는 덴마크 유학 중 의료보험제도의 혜택을 받아 무료 치료를 받은 경험을 했다. 이 경험은 훗날 한국에서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는 데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덴마크의 사회보장제도와 협동조합 정신은 그의 사회복지 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의 설립

귀국한 후 1968년 장기려 박사와 함께 민간의료보험인 '청십자(靑十字) 의료보험조합'을 만들었다. 채규철은 장기려 박사가 주도하던 **성경연구모임인 '부산 모임'**에서 만나 의료보험조합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채규철이 덴마크 정부의 초청으로 하슬레브 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경험을 이야기하며 의료보험조합의 설립을 제안한 것이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설립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이에 장기려는 채규철, 김서민, 조광제 등과 함께 조합 설립을 위한 구체적 작업에 착수하여 1968년 723명의 조합원을 모아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발족시켰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진실·사랑·협동"이라는 3대 정신을 근간으로 내세웠고, "건강할 때 이웃을 돕고 병이 났을 때 도움을 받자"는 표어를 내걸었다. 첫 가입자는 기독교 사상가이자 민주화 운동가인 함석헌이었으며, 조합원들은 매달 월 보험료 60원이라는 저렴한 비용만 지불하면 되었다. 당시 자장면 한 그릇이 50원 정도였음을 감안할 때 상당히 저렴한 수준이었다.

인생을 바꾼 비극적 사고

하지만 그해 10월 부산시에서 자동차 사고로 채규철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어 한쪽 눈을 잃고 용모가 크게 훼손되어 30회에 걸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사고는 극도로 운이 없게 일어났다. 농업활동을 하면서 건물에 페인트칠을 하기 위해 차에 페인트를 한가득 실었는데, 차가 전복되면서 쏟아진 페인트를 채규철이 뒤집어쓰고 정신을 차리는 사이에 불이 붙어 온몸이 페인트 범벅이 된 채 삽시간에 화염에 휩싸인 것이었다.

불굴의 의지로 재기

이런 극한의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고 채규철은 의료보험조합 사업을 재개하고, 간질환자들의 복지 향상을 위한 '장미회'를 결성하여 의료복지 운동을 폈다. 화상으로 인한 극심한 외모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유쾌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훗날 "내가 이래 봬도 비싼 몸이다", "하도 다림질을 세게 해놨더니 몇십 년이 지나도 얼굴이 늙지가 않는다"라고 농담까지 하면서 자신이 화상을 입은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기도 했다.

 

1974년에는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석사 학위 논문은 "한국 민간의료보험에 관한 고찰"이었다. 이는 그가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운영 경험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결과물이었다.

사회복지 운동의 확산

1975년에는 '사랑의 장기기증본부'를 창립하여 이사직을 맡기도 했다. 당시 장기기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매우 낮았던 상황에서, 이는 상당히 선구적인 활동이었다. 채규철은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면 어떤 편견도 개의치 않고 앞장섰다.

두밀리자연학교의 설립

1986년 경기도 가평군에 대안학교인 두밀리자연학교를 열어 '어린이가 바로 세상'이라는 철학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전국에서 모이는 아이들은 채규철 선생을 '이티(ET)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다. '이티 할아버지'라는 별명은 '이미 타버린 할아버지'라는 뜻으로, 화상으로 인한 그의 외모를 아이들이 친근하게 부른 것이었다.

두밀리자연학교의 교육철학

두밀리자연학교는 "신나게 놀자, 맛있게 먹자, 달콤하게 자자"가 교훈인 독특한 학교였다. 채규철 교장은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은 풀어주는 것"이라며 "결국 어린이들에게는 노는 게 최고"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두밀리자연학교는 "프로그램 없음"이 프로그램이었다.

 

3년 전에야 겨우 포장된 두밀리 진입로 옆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시골에서나 봤음직한 나무다리와 그 건너 "푸른 숲할아버지"와 "맑은 물할머니" 장승이 아이들을 맞았다. 다리 아래 두밀천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가장 훌륭한 학습장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물가 돌을 들춰 교과서에서만 봤던 플라나리아, 엽새우 같은 생물들을 발견하곤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했다. 봄에 심어 놓은 옥수수와 고추를 놀이삼아 따모은 아이들은 저녁반찬과 간식거리로 내놓았다. 아이들이 뿌리고 다른 아이들이 가꾸고 또 다른 친구들이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아이들 간에는 학교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끈끈한 동료애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교육의 실천

채규철은 "어른들의 손으로 아무리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른들의 눈으로 보는 세상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라며 아이들의 자발성을 중시했다. 정규교육이 아니라는 이유로 학교의 눈치를 봐가며 몰래 찾는 곳이었지만, 이미 두밀리는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한 교사는 "두밀리는 고향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고향을 찾아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자연학교의 존재 근거를 가장 간명하게 드러내주는 표현이었다. 아이들은 "외갓집" 추억으로 돌아가는 자연휴식처에서 진정한 교육을 경험했다.

지속적인 사회운동

2001년에는 공동체 평화운동 단체인 '철들지 않는 사람들'을 만들어 상임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70세가 가까운 나이에도 새로운 시민운동 단체를 조직할 정도로 그의 사회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저술 활동과 사상

채규철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소나기 30분》이 있고, 수필집으로는 《사람은 두 번 죽지 않는다》《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 어린이들을 위한 《ET 할아버지와 두밀리자연학교》,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을 번역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등이 있다.

 

특히 마틴 루터 킹의 연설집을 번역한 것은 그의 사회운동가적 면모와 평화에 대한 염원을 잘 보여준다. 그는 비폭력 저항과 사회정의 실현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으며, 이를 교육과 복지 활동을 통해 실천했다.

인정받은 공로와 수상

2000년에는 '제1회 풀뿌리 환경상'을 수상하였으며, 2005년에는 '제4회 교보환경문화상의 환경교육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는 그의 자연교육과 환경친화적 교육철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최후까지 이어진 헌신

채규철은 임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 활동을 펼쳤다. 70세가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2006년 12월 14일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향년 70세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회복지와 대안교육을 위해 헌신했던 진정한 교육자였다.

가족과 개인적 삶

채규철은 조성례씨와 결혼했지만, 덴마크 유학 중 부인이 폐결핵으로 고생하는 등 개인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정희(56)씨와 아들 진석(인천대 컴퓨터공학과 교수)·광석(국민대 성곡도서관 사서)씨, 딸 송화(대구보건대 겸임 교수)씨 등이 있다.

채규철의 사상과 철학

기독교적 휴머니즘

채규철의 모든 활동의 바탕에는 기독교적 휴머니즘이 있었다. 조부 대부터 이어진 기독교 신앙은 그에게 이웃사랑과 사회봉사의 정신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기독교 신앙은 교리나 의식에 매몰되지 않고 실천적 사랑으로 발현되었다.

자연주의 교육철학

두밀리자연학교를 통해 보여준 그의 자연주의 교육철학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어린이가 바로 세상"이라는 그의 철학은 아이들을 교육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 본 것이었다. 이는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사상과 일맥상통하면서도, 한국적 상황에 맞게 구체화된 것이었다.

협동조합 정신

덴마크에서 배운 협동조합 정신은 그의 평생 활동을 관통하는 핵심 가치였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건강할 때 이웃을 돕고 병들었을 때 도움을 받자"는 표어는 바로 이런 상부상조 정신의 발현이었다.

현재적 의미와 유산

대안교육의 선구자

채규철은 한국 대안교육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1980년대 중반 획일적 입시교육이 절정에 달했을 때 두밀리자연학교를 설립하여 자연친화적이고 인간중심적인 교육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활발해진 대안교육 운동의 이론적·실천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사회보장제도의 원형 제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한국 사회보장제도의 원형이었다. 정부 주도의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되기 10년 전에 민간에서 시작된 이 제도는 시민사회의 자발적 상부상조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는 오늘날 사회적 경제협동조합 운동의 선구적 모델이기도 했다.

장애와 차별을 극복한 삶

극심한 화상으로 인한 외모 변화에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교육과 소통의 도구로 활용한 그의 모습은 장애와 차별을 극복하는 삶의 모범을 보여준다. '이티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아이들과 소통한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자기수용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볼 수 있다.

동시대 인물들과의 관계

장기려 박사와의 협력

장기려 박사와의 만남과 협력은 채규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은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의료복지라는 공통 목표를 추구했다. 장기려의 의술과 의료철학, 채규철의 협동조합 경험과 조직력이 결합되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라는 혁신적 제도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함석헌과의 인연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첫 가입자가 함석헌이었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크다. 함석헌은 당시 대표적인 종교 사상가이자 민주화 운동가였는데, 그가 채규철의 사업에 첫 번째로 동참한 것은 이 사업의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비판과 한계

제도적 지속성의 문제

채규철이 주도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훌륭한 실험이었지만, 정부 주도의 국민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면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민간 주도의 사회보장제도가 제도적 지속성을 갖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대안교육의 제한적 확산

두밀리자연학교의 교육철학은 훌륭했지만, 주말 프로그램 중심이어서 전면적인 교육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에게만 접근 가능한 교육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결론: 채규철이 남긴 유산

채규철은 "한국의 모세"로 불릴 만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그는 극한의 개인적 시련을 사회적 헌신의 동력으로 승화시켰으며, 교육을 통한 사회변화라는 신념을 평생 실천했다.

 

그의 가장 큰 유산은 "사람 중심의 교육과 복지"라는 철학이다. 제도나 시설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 변화를 추구한 그의 접근법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특히 "어린이가 바로 세상"이라는 그의 교육철학은 아이들을 미래의 주역이 아닌 현재의 온전한 존재로 본 혁신적 관점이었다.

 

이는 오늘날 아동인권참여형 교육의 이론적 바탕이 되고 있다. 채규철의 삶은 개인적 고통을 사회적 사랑으로 승화시킨 휴머니스트의 전형을 보여준다.

 

극심한 화상으로 인한 외모 변화를 '이티 할아버지'라는 친근한 별명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아이들과 더 깊이 소통한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교육자의 자세를 볼 수 있다. 21세기 한국 사회가 직면한 교육 위기, 사회복지 문제, 공동체 해체 등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채규철이 제시한 협동과 상생, 자연친화적 교육, 실천적 사랑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삶과 사상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귀중한 지침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