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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업원(淨業院) : 고려와 조선 시대 왕실 여인들이 출가하여 수행하던 비구니 사찰

by 지식한입드림 2026. 2. 23.

정업원(淨業院)은 고려와 조선 시대 도성 안에 존재했던 왕실 비구니 사찰로, 왕비와 후궁 등 왕실 여인들이 출가하여 수행하고 기도하던 곳입니다.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도 수차례 치폐를 반복하며 조선 중기까지 명맥을 이어간 역사적 공간입니다.

정업원이란 무엇인가 — 개념과 어원

정업원(淨業院)은 한자 그대로 풀면 '깨끗한 업(業)을 닦는 원(院)'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정업(淨業)'은 맑고 깨끗한 수행을 통해 인과(因果)의 업을 정화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속세의 번뇌와 탐욕을 끊고 부처의 가르침 아래 청정한 삶을 영위하는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정업원이라는 명칭은 단순히 특정 사찰 하나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었습니다. 시대에 따라 왕실 출신의 비구니들이 머무르는 사찰을 통칭하는 일반명사로도 쓰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곳에 정업원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였습니다. 역사 기록 속에서 정업원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왕실 비구니 도량의 대명사로 기능하였습니다.

'정업(淨業)'의 불교적 의미

불교 수행 전통에서 정업은 삼업(三業), 즉 신업(身業)·구업(口業)·의업(意業)을 청정하게 닦는 일을 가리킵니다. 몸으로는 살생·도둑질·음행을 삼가고, 입으로는 거짓말·이간질·욕설을 멀리하며, 마음으로는 탐욕·성냄·어리석음을 다스리는 것이 정업 수행의 핵심입니다. 궁궐 밖으로 나온 왕실 여인들이 이러한 청정 수행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정업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구니 수행처로서의 성격

정업원에 머문 이들은 대부분 비구니, 즉 여성 출가 수행자들이었습니다. 조선 초기 정업원의 비구니들은 사족(士族)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며, 주지는 왕족이나 왕실과 깊은 친인척 관계에 있는 여성들이 맡았습니다. 이 때문에 정업원은 일반 사찰과는 달리 국가로부터 노비와 전답 등 경제적 지원을 받는 특별한 사찰로 기능하였습니다.

왕실 여인들의 의지처

왕이 세상을 떠난 뒤, 혹은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궁궐에서 쫓겨난 왕비나 후궁들이 향할 곳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오직 왕만을 위해 존재했던 여인들이 왕의 죽음과 함께 존재 의미를 잃게 되는 구조 속에서, 정업원은 이들이 수절하며 죽은 왕의 명복을 빌고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공식적 피난처였습니다. 이처럼 정업원은 단순한 종교 공간을 넘어 몰락한 왕실 여성들의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정업원의 역사적 기원 — 고려시대부터의 전통

정업원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164년, 즉 고려 의종 18년에 의종이 정업원에 행차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이전부터 이미 정업원이 운영되고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고려시대에 정업원은 주로 수도인 개경에 위치하였습니다.

고려 시대 정업원의 운영

고려 고종 재위 기간인 1252년,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에는 문신 박훤의 집을 임시로 정업원으로 삼아 성 안에 있던 비구니들을 거처하게 하였습니다. 이후 개경으로 환도한 뒤에는 다시 도성 내에 정업원을 두었습니다. 충숙왕 때에는 남편 이집을 살해한 반씨를 정업원에 있게 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당시 정업원이 단순한 수행처를 넘어 특수한 신분의 여성들이 격리되어 생활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말의 정업원

고려 말에는 비구니 묘장(妙藏)이 한때 정업원의 주지로 있었으며, 고려말부터 조선 초에는 공민왕의 후비인 혜비(惠妃) 이씨가 정업원의 주지를 맡았습니다. 이제현의 딸인 혜비는 고려가 멸망하는 역사적 격변 속에서 망국의 슬픔을 안고 정업원에 머물렀습니다. 이처럼 고려시대 정업원은 이미 왕실 여인들이 정치적 혼란을 피해 의탁하는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조선 건국 후의 계승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건설하면서 고려의 정업원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여 개경의 정업원을 한양으로 옮겨 건립하였습니다. 이는 고려의 정업원이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새 왕조 아래에서도 연속성을 유지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1408년, 즉 태종 8년에 주지로 있던 공민왕의 후비 혜비가 사망하자, 소도군 방석의 처 심씨가 새로운 주지로 임명되었습니다.

조선 시대 정업원의 위치와 구조

조선 시대 정업원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학계에서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크게 두 가지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왔는데, 하나는 응봉 아래 창경궁 서쪽에 있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동대문 밖 동망봉 아래였다는 설입니다.

도성 내 창덕궁 인근의 위치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다수의 문헌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정업원은 창덕궁 후원 뒤편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창덕궁에서는 후원에 있는 광지문(廣知門)을 통해 정업원과 통행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즉 정업원은 도성 안, 궁궐과 지근거리에 위치하여 왕실 여인들이 쉽게 왕래할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이는 정업원이 왕실의 공식적인 기도처로 기능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었습니다.

동망봉 아래 정업원구기비의 문제

1771년, 즉 영조 47년에 영조는 동대문 밖 숭인동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웠습니다. 이 비석의 존재로 인해 후세에 정업원이 동망봉 아래에 있었다는 인식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동망봉 일대에서 생활했다는 사실과, 그녀가 정업원 주지로 있었다는 사실이 혼동되어 잘못 전해진 결과였습니다. 영조가 비를 세울 당시에는 이미 정업원이 없어진 지 160여 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최신 연구 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탁효정 전임연구원은 승정원일기와 해주정씨 고문서 등을 분석하여 정업원 위치를 새롭게 규명하였습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업원은 수차례의 치폐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연산군 말에서 중종 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창덕궁 인근 산야 지대에 위치하였습니다. 동망봉 아래에 정업원구기비가 세워진 것은, 연산군 대에 도성 밖으로 축출된 정업원 비구니들이 인창방 일대에 새롭게 정업원을 설치하였고, 그 당시 주지가 정순왕후였기 때문에 영조가 정순왕후의 옛 집터에 비를 세운 것으로 해석됩니다.

정업원의 치폐 과정 — 유교와 불교의 갈등

조선은 건국 이념으로 성리학적 유교를 채택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이 강력히 추진되었고, 왕실 비구니 사찰인 정업원은 유생들의 끊임없는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조선 전기에만 정업원은 세 차례에 걸쳐 철폐되었다가 복설되는 굴곡진 역사를 겪었습니다.

시기 주요 사건
태종 대 (1400년대 초) 유생들의 정업원 폐지 논의 시작
세종 30년 (1448) 척불 정책에 의해 정업원 혁파
세조 3년 (1457) 정업원 복립 결정
세조 5년 (1459) 원사(院舍) 중창, 노비 200구 지급
예종 대 국가적 비호 지속
성종 대 유생들의 폐지 논의 재개
연산군 11년 (1505) 정업원 혁파, 비구니 성 밖 축출
중종 12년 (1517) 독서당을 두모포로 이전, 정업원 자리 빈절이 됨
명종 5년 (1550) 문정왕후 주도로 인수궁(仁壽宮)으로 복설
선조 40년 (1612) 정업원 최종 폐지, 비구니 성 밖으로 축출
인조 대 이후 인조반정 후 서인 정권에 의해 영구 혁파
영조 47년 (1771) 정업원구기비 건립

태종·세종 대의 폐지

태종 때부터 유생들은 궁궐 내에 비구니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특히 성리학적 질서에서 사찰은 음란과 방종의 온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왕실과 가까운 정업원은 더욱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결국 1448년 세종 30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와 척불 정책의 강화 속에서 정업원은 혁파되었습니다.

세조 대의 복설

그러나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세조는 즉위 후 정업원을 다시 세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457년에 복립이 결정되고 1459년에는 원사가 중창되었습니다. 이해에 사원의 비용으로 공포가(貢布價)를 특사하고 이듬해에는 왕이 두 차례 직접 행차하는 한편, 200구의 노비를 지급하는 등 국가적 후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 정업원은 역사상 가장 번성한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연산군 대의 혁파와 이후의 부침

연산군 11년인 1505년, 왕의 타락 정치로 정업원은 다시 혁파되고 비구니들은 성 밖으로 축출되었습니다. 그 뒤 정업원은 독서당(讀書堂)으로 사용되다가, 독서당이 두모포로 이전한 1517년 이후에는 빈 절로 방치되었습니다. 명종 대에는 수렴청정을 한 문정왕후의 강력한 지원으로 인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치되었지만, 이후에도 유생들의 반발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1612년 선조 대에 정업원은 최종적으로 폐지되어 비구니들은 성 밖으로 쫓겨났으며,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권이 집권하면서 다시는 복구되지 못하였습니다.

정업원의 주지들 — 역대 왕실 여인들

조선 전기 정업원의 주지를 역임한 것으로 실록에서 확인되는 인물은 총 7명입니다. 비구니 해민(海敏)을 제외하면 모두 왕실과 직접적인 친인척 관계에 있는 여성들이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남편이 정치적 변고로 살해되거나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한 경우였습니다.

공민왕 후비 혜비 이씨

공민왕의 후비인 혜비 이씨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정업원 주지를 역임하였습니다. 이제현의 딸인 그녀는 조선 건국 후에도 정업원에 머물다 140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혜비의 사례는 고려의 정업원 전통이 조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소도군 부인 심씨

혜비가 사망한 1408년, 1차 왕자의 난 때 희생된 소도군 방석의 처 심씨가 정업원의 새 주지로 임명되었습니다. 남편이 정치적 변고로 목숨을 잃자 궁궐을 떠나 정업원의 주지가 된 심씨의 사례는, 정업원이 정쟁의 희생양이 된 왕실 여인들의 피난처로 기능하였음을 잘 보여줍니다.

정순왕후 송씨의 특별한 사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는 정업원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입니다.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면서, 정순왕후는 군부인으로 신분이 강등되어 궁에서 쫓겨났습니다. 이후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 실패로 친정아버지마저 처형되면서 관비 신분으로까지 전락하였습니다. 세조는 그녀에게 '신분은 노비이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려 정업원으로 보냈습니다.

정순왕후는 정업원에 머물면서 단종의 명복을 빌며 평생을 보냈습니다. 생계를 위해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샘에서 지초로 옷감을 물들여 파는 염색업에 종사하였으며, 평생 무명옷만 입고 고기와 생선을 먹지 않으며 남편을 그리워하였다고 전합니다.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해 매일 아침저녁 동망봉에 올라 통곡하였으며, 그 슬픔의 곡소리가 마을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1521년 중종 16년에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64년간을 홀로 살아간 정순왕후의 삶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애절한 이야기 중 하나로 전해집니다.

정업원의 경제적 기반과 운영 실태

정업원은 단순히 종교적 수행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갖춘 기관이었습니다. 특히 왕실의 후원 아래 운영되던 시기에는 국가로부터 지속적인 물적 지원을 받았습니다.

국가로부터의 지원

조선 초기 정업원은 왕실로부터 노비, 별사전(別賜田, 임금이 특별히 하사한 전답), 분수료(焚修料, 향을 피워 불공을 드리는 데 드는 비용) 등을 지급받았습니다. 세조 대에는 200구의 노비가 지급되고 공포가 특사되는 등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지원을 받았습니다. 정업원의 운영은 나라로부터 지급받은 토지와 노비, 삭료(朔料, 월급)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업원 구성원의 신분

정업원의 비구니들은 주로 남편을 잃은 선왕의 후궁, 왕실의 부녀자, 그리고 사족 출신의 부녀자들이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이들은 논밭과 노비를 소유하여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정업원의 비구니 중에는 신분이 낮은 이나 창기(娼妓) 출신도 있었다고 하여, 정업원이 모든 계층의 여성을 수용하는 열린 공간이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지의 임명 방식

정업원을 총괄하는 주지는 행실이 근엄하고 독실한 비구니 가운데서, 대왕대비나 왕대비 등 왕실의 어른이 추천하고 왕이 관교(官敎)로써 임명하였습니다. 이처럼 주지 임명에 왕실이 직접 개입하였다는 사실은 정업원이 왕실의 공식적인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지녔음을 잘 보여줍니다. 주지는 왕실의 부녀자, 선왕의 후궁, 사족의 부녀자 중에서 선발되는 것이 관례였으며, 이 때문에 정업원의 주지직은 사실상 왕실의 일원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지위였습니다.

정업원과 조선 왕실 불교의 관계

정업원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이 강력히 추진되던 시기에도 왕실 불교의 마지막 보루로서 그 명맥을 이어나갔습니다. 도성 안에 위치한 유일한 불교 도량으로서 정업원은 왕실 여성들의 신앙생활과 직결된 핵심 공간이었습니다.

왕실 여성들의 신앙 중심지

정업원은 대왕대비로부터 나인에 이르기까지 궁궐 안 여인들의 불교 신행(信行)의 본산이었습니다. 인수대비가 불상을 조성하여 정업원으로 보낸 기록은 당시 왕실 여성들이 정업원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왕실 여인들은 궁궐의 특수성으로 인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궁궐이나 도성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도성 내에 위치한 정업원은 그들에게 더욱 소중한 신앙 공간이었습니다.

산중 불교와의 연결 고리

당시 조선의 불교는 유생들의 탄압으로 인해 점차 도성 밖 산간 지역으로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업원은 도성 내에서 산중 불교계와 소통하며 불교를 수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즉 정업원은 왕실 비구니 도량으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도심 속 불교와 산중 불교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한 것입니다.

후궁 출가의 통로

조선 전기에는 왕이 승하한 직후 후궁들이 출가하는 경우가 빈번하였습니다. 이들은 정업원으로 직접 들어가지 않는 경우에도 정업원을 통해 승려계(僧侶戒)를 받는 방식으로 출가하였습니다. 이처럼 정업원은 조선 왕실의 불교 신앙을 이어나가는 신행 기구로 활용되었으며, 후궁들이 출가할 수 있는 공식적인 창구 역할을 하였습니다.

정업원구기비와 현재의 문화유산

정업원이 인조반정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약 160여 년이 지난 1771년, 영조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를 추모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를 세웠습니다. 이 비석과 비각은 오늘날까지 남아 조선 역사의 생생한 증거로 전해집니다.

정업원구기비의 형태와 내용

정업원구기비의 총 높이는 218cm이며, 비신 높이는 124cm, 너비 57cm, 두께 29cm입니다. 방형의 받침돌과 옥개형의 머릿돌은 화강암으로, 몸돌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비문은 앞면과 뒷면 모두 영조의 친필로 쓰여 있으며, 앞면에는 '淨業院舊基(정업원구기)', 뒷면에는 '皇朝正德十六年 辛巳六月初四日後二百五十一年 辛卯九月初六日立 前後皆親書(황조정덕16년 신사6월4일후 251년 신묘9월6일립 전후개친서)'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비각의 현판 글씨 역시 영조의 친필이며, 비문 속 '前峯後巖於千萬年(앞봉우리, 뒤의 바위, 천만년을 가리)'라는 문구는 정순왕후에 대한 영조의 깊은 애도를 담고 있습니다.

청룡사와 정업원의 관계

정업원 터 위에는 오늘날 청룡사(靑龍寺)가 들어서 있습니다. 정업원이 폐사된 이후, 도성 밖으로 쫓겨난 비구니들이 정순왕후가 머물던 숭인동 일대에 새롭게 자리를 잡으면서 이 지역에 사찰의 명맥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순조 때에 지금의 청룡사가 그 자리에 들어서면서, 청룡사는 정업원의 역사적 전통과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함께 간직한 비구니 사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정업원구기비는 청룡사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지정과 현황

정업원 터는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에 지정명칭이 한글화 기준에 따라 '정업원 터'로 변경되었습니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 이 문화유산은 동망봉을 배경으로 조선의 비극적인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동망봉에는 영조가 친필로 쓴 '동망봉(東望峰)' 세 글자를 바위에 새기도록 명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이 지역이 채석장으로 사용되면서 바위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2011년에는 근처에 동망정이라는 정자가 새롭게 건립되어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고 있습니다.

정업원이 남긴 역사적 의미와 유산

정업원은 단순한 불교 사찰 이상의 복합적인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습니다. 종교적·사회적·정치적 여러 맥락이 교차하는 이 공간은 조선 전기 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창구입니다.

여성 불교의 산실

정업원은 조선 전기 여성 불교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였습니다. 숭유억불이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압박 속에서도 정업원을 중심으로 비구니 수행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정업원의 비구니 주지들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를 넘어 당시 조선 불교문화의 상징적 존재였으며, 산중 도량과 소통하고 불교를 수호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왕실 정치의 그늘에서 살아간 여성들

정업원의 역사는 조선 시대 왕실 정치의 격변 속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였던 여성들의 삶을 생생히 증언합니다. 왕의 죽음, 왕위 찬탈, 정치적 숙청 등의 격변이 일어날 때마다 왕비와 후궁들은 졸지에 존재 기반을 잃고 사회적 사각지대로 내몰렸습니다. 정업원은 이들이 최소한의 안전과 존엄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국가 공인의 피난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정업원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신앙과 이념이 충돌할 때 사회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정치적 약자의 삶을 사회는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가, 그리고 역사의 변곡점마다 묵묵히 자신의 삶을 일구어나간 여성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들입니다. 정업원 터를 찾아 비석 앞에 서면,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64년간 단종의 명복을 빌며 살아간 정순왕후의 삶이 오늘도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유교와 불교가 충돌하는 역사의 한가운데서, 정업원은 권력으로부터 버려진 여인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나간 공간이었습니다. 지금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남아 있는 정업원 터는, 그 모든 이야기를 조용히 품고 역사의 증인으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