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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파 하이재킹 : 1970년 일본 극좌 무장단체가 자행한 일본 최초의 항공기 공중납치 사건

by 지식한입드림 2025. 10. 31.

적군파 하이재킹은 1970년 3월 31일 일본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赤軍派)가 일본항공 351편 요도호(よど号)를 납치하여 북한으로 망명을 시도한 일본 최초의 항공기 공중납치 사건입니다.

적군파의 형성 배경

적군파는 1969년 9월 결성된 일본의 극좌파 무장투쟁 단체입니다. 1960년대 일본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이와 함께 사회적 갈등과 계층 간 격차가 심화되었습니다. 특히 청년층 사이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과 미국과의 동맹 관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일본 공산주의자동맹(분트) 내부에서 시오미 타카야(鹽見孝也)를 중심으로 한 관서파는 "세계혁명론"과 "전단계 무장봉기론"을 주장하며 분트 내에서 적군파라는 파벌을 형성했습니다. 이들은 기존의 평화적 투쟁 방식에 한계를 느끼고, 무력을 통한 혁명만이 부르주아 권력을 타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적군파는 "혁명에는 군사적인 행동이 필수적이며, 혁명전쟁 수행으로 혁명을 쟁취한다"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분파로,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를 바탕으로 한 무장투쟁을 통해 일본 정부를 전복시키고 사회주의 공화제 정부를 세운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도호 납치 사건의 전개

1970년 3월 31일 오전 7시 33분, 타미야 타카마로(田宮高麿)를 중심으로 한 적군파 조직원 9명이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출발한 일본항공 351편에 승객으로 위장하여 탑승했습니다. 이들은 큰 가방에 일본도, 권총, 폭탄 등으로 보이는 무기들을 숨겨왔으나,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철저한 보안검색이 없어 쉽게 기내로 반입할 수 있었습니다.

항공기가 후지산 상공을 비행하던 중, 9명의 적군파 조직원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들고 승무원과 승객 129명을 제압했습니다. 이들은 "우리는 적군파다! 이 비행기는 현시간부로 우리가 탈취한다. 모두 머리 위로 손을 올려라. 움직이는 자는 즉각 사살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범인들은 남성 승객들을 창가로 이동시키고 준비해온 로프로 묶었으며, 일부는 조종실로 들어가 항공기관사를 인질로 잡고 기장에게 북한의 평양으로 항로를 변경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시다 기장의 기지

요도호의 기장이었던 이시다 신지(石田真二)는 1만 시간 이상의 비행 경력을 가진 베테랑 조종사였습니다. 그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범인들을 설득했습니다. "이 비행기는 국내선이므로 평양까지 갈 연료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추락할 위험이 있으니 일단 후쿠오카 공항에 착륙해서 재급유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는 연료가 충분했지만, 기장의 기지로 인해 범인들은 이를 받아들였고, 오전 8시 59분 요도호는 후쿠오카 공항(이타즈케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기장은 이 기회를 이용해 범인들을 설득하여 여성, 어린이, 노약자, 환자 등 23명의 인질을 석방하게 했습니다.

김포공항으로의 기만 작전

후쿠오카 공항에서 재급유를 마친 요도호는 오후 1시 59분 평양을 향해 이륙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미 일본 교통성으로부터 항공기 납치 소식을 전달받은 상태였습니다.

한국의 김포공항 관제탑에서는 채희석 관제사가 중심이 되어 요도호를 김포국제공항으로 유도하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요도호가 한반도 상공에 진입하자, 한국 측은 "여기는 평양입니다. 진입 관제를 실시합니다"라고 무선으로 연락했습니다.

범인들은 북한의 공용어인 조선어는 물론 영어도 잘 몰랐기 때문에 한국으로 유도되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김포공항에는 조선인민군 복장을 한 한국군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평양 도착 환영'이라는 현수막까지 준비하는 등 철저한 위장 공작을 실시했습니다.

김포공항에서의 3일간 대치

3월 31일 오후 2시 40분경 요도호는 김포공항에 착륙했습니다. 처음에는 속임수가 성공한 듯 보였으나, 범인 중 한 명이 영어로 "여기가 서울이냐?"고 묻자 한국군 병사가 "그렇다"고 답하면서 김포공항이라는 사실이 발각되었습니다.

이후 3일간의 교착상태가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측은 범인들과 영어로 교섭을 시도했으나 범인들이 영어를 잘 몰라 대화가 성립하지 않았고, 결국 일본어로 교섭을 재개했습니다. 범인들은 평양으로 즉시 떠나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한국 측은 엔진 재가동을 위한 보조시동기 제공을 거절하며 상황을 지연시켰습니다.

야마무라 차관의 희생

교섭이 장기화되자 일본 정부는 특별기로 야마무라 신지로(山村新治郎) 운수성 정무차관을 파견했습니다. 4월 3일 아침, 야마무라 차관은 "내가 대신 인질로 간다면 승객들을 풀어줄 수 있겠는가?"라고 제안했습니다.

범인들은 이 제안을 수락했고, 조종사 3명을 제외한 모든 승객을 석방하는 대신 야마무라 차관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대치 75시간 만에 요도호는 마침내 북한을 향해 김포공항을 떠났습니다.

북한 도착과 결말

4월 3일 오후 7시 21분, 요도호는 북한 평양 교외의 미림비행장에 착륙했습니다. 북한 당국은 범인들의 무장 해제를 요구했는데, 놀랍게도 그들이 소지했던 무기들은 모두 장난감이나 모조품이었습니다.

북한은 처음에는 "인도주의적 차원에 따라 범인들을 제외한 승무원과 기체는 돌려보내겠다"고 했으나, 요도호가 도착하자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승무원과 기체의 빠른 송환은 보장할 수 없다"고 입장을 번복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측의 강한 반발에 직면한 북한은 결국 범인들을 제외한 승무원과 야마무라 차관, 그리고 항공기를 일본으로 송환했습니다.

납치범들의 북한에서의 삶

북한에 남은 적군파 9명은 북한 당국에 의해 망명을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들은 북한에서 주체사상 교육을 받으며 정착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주모자 타미야 타카마로는 199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사망 전날까지도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는 증언이 있어 일부에서는 의문사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3명이 더 사망했고, 당시 16세였던 1명은 1988년 일본에 잠입해 지하활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었습니다.

2000년에는 1명이 태국에서 달러 위조 혐의로 체포되어 일본으로 송환되었고, 2002년에는 4명이 일본으로 귀국하여 자수했습니다. 이들의 귀국은 북한이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국제적 영향과 항공보안의 변화

요도호 납치 사건은 일본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전국의 공항에 금속탐지기와 수하물 X레이 검사가 의무화되었습니다. 또한 승객과 승무원에 대한 보안검색이 강화되어 현재와 같은 항공보안 시스템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1970년 12월 헤이그에서 "항공기의 불법납치 억제를 위한 협약(헤이그 협약)"이 체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협약은 항공기 납치를 국제적으로 처벌해야 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체약국들이 범인들을 기소하거나 인도할 의무를 명시했습니다.

사건의 역사적 의미

요도호 하이재킹 사건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일본 전후사에서 학생 운동과 극좌 무장투쟁의 절정과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에서 연합적군이 동료들을 대량 살해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일본 사회의 좌익 운동에 대한 환멸이 확산되었습니다.

둘째, 냉전 시대의 복잡한 국제관계를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한국, 일본, 북한, 미국이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응하면서 외교적 협상과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한국의 기만 작전은 인질의 안전을 보장하면서도 북한으로의 무단 침입을 방지한 기지있는 대응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셋째, 항공보안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항공기 내부의 보안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으나, 이 사건 이후 전 세계적으로 항공보안 시스템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습니다.

언론과 대중의 반응

요도호 사건은 일본 언론사상 초유의 실시간 보도 사건이었습니다. NHK가 요도호 승객들의 귀국을 다룬 특별방송은 40%가 넘는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일본 국민들은 이 사건을 통해 극좌 무장투쟁의 현실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이후 과격한 학생 운동에 대한 지지가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 사건은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김포공항 관제사 채희석의 기지있는 대응이 알려지면서 한국 언론은 이를 "납치된 비행기를 다시 납치한 작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채희석 관제사는 이후 보안상의 이유로 사건에 대해 함구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오랫동안 그의 공로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문화적 영향

요도호 사건은 일본의 대중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수많은 다큐멘터리, 영화, 소설, 만화의 소재가 되었고, 특히 적군파와 극좌 무장투쟁을 다룬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최근에는 한국의 넷플릭스 영화 '굿뉴스'가 이 사건을 소재로 제작되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또한 일본 사회의 집단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의 분노와 좌절이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된 것에 대해 일본 사회는 깊은 성찰을 하게 되었고, 이후 정치 참여와 사회 개혁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요도호 사건의 상세 분석

적군파 조직원 9명의 신원

요도호를 납치한 적군파 조직원 9명의 신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모자인 타미야 타카마로(田宮高麿)는 1943년 이와테현에서 태어나 오사카시립대학에서 학생운동에 참가한 인물로, 적군파 내에서도 군사위원장을 맡고 있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인질들에게 유일하게 자신의 성을 밝힌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오카모토 타케시(岡本武)는 당시 23세로 훗날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 테러의 주범 오카모토 고조의 형이었습니다. 와카바야시 마사토시(若林盛亮)는 후에 북한에서 사망했고, 아카기 시로(赤木志郎)와 아베 기미히로(阿部公博)는 2002년 일본으로 귀국하여 자수했습니다.

코니시 다카히로(小西隆裕)는 북한에서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고, 나머지 멤버들도 북한에서 각각 다른 운명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북한의 대남공작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일본 내에서 지속적인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보잉 727 요도호의 특징

납치된 항공기는 일본항공 소속 보잉 727-89 기종으로 기체번호는 JA8315였습니다. 당시 일본항공은 보잉 727 항공기들에 일본의 강 이름을 따서 애칭을 붙였는데, 이 항공기에는 오사카를 관통하는 요도강(淀川)의 이름을 따서 '요도호(よど号)'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보잉 727은 1960년대를 대표하는 중단거리 제트 여객기로, 3개의 엔진을 기체 후미에 배치한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최대 승객 수용량은 189명이었으나, 당시 요도호는 131명의 승객과 7명의 승무원이 탑승하여 총 138명이 탑승한 상태였습니다.

1970년대 일본의 정치적 상황

요도호 사건이 발생한 1970년은 일본에서 극좌 무장투쟁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1960년 안보투쟁 이후 학생운동이 급진화되었고, 1968년에는 전국 대학에서 대학분쟁이 격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화적 투쟁의 한계를 느낀 일부 극좌파들이 무장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적군파는 당시 약 400명의 구성원을 가진 조직으로, "전단계 무장봉기론"과 "세계혁명론"을 내세우며 일본 정부 전복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들의 사상적 배경에는 마오쩌둥의 인민전쟁론과 체 게바라의 게릴라 이론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국제근거지론의 배경

요도호 사건의 직접적 배경이 된 것은 적군파의 "국제근거지론"이었습니다. 1969년 11월 야마나시현 대보살고개에서 적군파가 군사훈련을 하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53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른바 대보살고개 사건으로 인해 적군파의 국내 조직이 궤멸 상태에 빠지자, 해외에 혁명 기지를 마련해야 한다는 논리가 제기되었습니다.

시오미 타카야 의장이 체포되면서 발견된 'H.J'라는 메모는 하이재킹(Hijack)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당시 경찰들은 이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적군파는 이를 기회로 삼아 서둘러 항공기 납치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한국 정부의 대응 과정

한국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요도호 납치 소식을 전달받은 후 즉시 대책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계원을 중심으로 한 대책팀은 요도호를 북한으로 보낼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외교적 파장과 안보 문제를 고려하여 김포공항으로 유도하는 방안을 결정했습니다.

김포공항 관제탑의 채희석 관제사는 "여기는 평양 관제탑입니다"라고 무선으로 응답하며 요도호를 남쪽으로 유도했습니다. 이때 한국군은 조선인민군 복장을 준비하고 '평양 도착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제작하는 등 치밀한 위장 공작을 펼쳤습니다.

외교적 협상과 국제적 관심

요도호 사건은 냉전 시대의 복잡한 국제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소련과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북한 정부에 승객과 승무원의 안전한 송환을 요청했고, 북한은 '인도주의에 근거하여 승무원과 승객은 즉시 돌려보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미국 정부도 이 사건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요도호에 탑승한 미국인 승객 2명의 안전을 우려했습니다. 미국은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승객들의 안전한 송환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고, 이는 한국 정부의 대응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언론의 역할과 보도 윤리

요도호 사건은 일본 언론사상 처음으로 실시간 중계된 대형 사건이었습니다. NHK를 비롯한 일본의 주요 방송사들이 사건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했고, 특히 김포공항에서의 대치 상황과 승객들의 귀국 과정이 생중계되어 일본 전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보도 경쟁으로 인해 일부 언론은 사실과 다른 내용을 보도하거나 추측성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는 이후 일본 언론계에서 사건 보도의 윤리와 책임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건 이후의 변화와 교훈

항공보안 시스템의 혁신

요도호 사건은 전 세계 항공보안 시스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 사건 이전까지는 항공기 탑승 시 간단한 신원확인만 받으면 되었고, 수하물 검색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 공항에 금속탐지기, X레이 검색기 등 보안장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공항에서 경험하는 엄격한 보안검색 절차의 출발점이 바로 이 요도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승객의 신원확인, 수하물 검색, 금속탐지, 액체류 반입 제한 등 현재의 항공보안 시스템의 기본 틀이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적군파 하이재킹 사건은 단순한 범죄 사건을 넘어서 1970년대 동아시아의 정치적 격변과 냉전 질서, 그리고 항공보안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오늘날에도 정치적 극단주의의 위험성과 평화적 해결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교훈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