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승이란?
재가승(在家僧)은 조선시대 함경북도 두만강 유역과 인근 산간 지방에 거주했던 특수한 집단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일반적인 불교 승려와는 달리, 가족을 이루고 사회생활을 영위하면서도 불교적 생활방식을 유지한 독특한 공동체였습니다.
거주 지역과 마을 형성
주요 거주지
재가승들은 주로 함경북도의 경흥, 경원, 회령, 부령, 은성, 종성 지역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습니다. 이 지역들은 험준한 산악 지대와 두만강을 끼고 있어 외부와의 교류가 제한된 폐쇄적인 환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마을 구조
이들은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며 마을의 중심에 불당을 세우고,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였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그들의 독특한 문화와 생활방식을 보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재가승의 종교와 문화
불교 중심의 생활
재가승들은 불교 신앙을 기반으로 생활하였으며, 마을의 중심에는 항상 불당이 존재하였습니다. 밤이 되면 주민들이 불당에 모여 불경을 배우거나 법고춤을 추며 종교적 의식을 치렀습니다.
의례와 장례 문화
- 혼례와 장례는 마을의 공동 불당에서 진행되었습니다.
- 장례 의식은 불교식 화장을 기본으로 했으며, 유골을 묻은 자리에 버드나무를 심는 전통을 유지하였습니다.
- 제사는 남성이 아닌 여성과 어린이가 주관하였으며, 의식 중에는 붉은 옷을 입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사회제도와 마을 운영
지도 체계
재가승 마을의 운영은 불경에 능통한 인물을 촌장으로 선출하여 이루어졌으며, 촌장이 종교 및 행정을 담당하고 방장이 군사적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러한 체계는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재산 및 상속 제도
재산과 제사는 특정 장남에게만 집중되지 않고 형제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조선의 상속 방식과 차이를 보이는 점으로, 공동체적 성격을 반영한 제도였습니다.
생활방식과 생업
생업
- 남성은 주로 종이 제조를 담당하였으며, 특히 귀리로 만든 황지를 생산하여 세금으로 바쳤습니다.
- 여성은 길쌈과 직조를 담당하며 가정 경제를 책임졌습니다.
- 농업 또한 병행하였으며, 자급자족이 가능한 형태의 경제 구조를 유지하였습니다.
의복과 주거
- 여성들은 일반적인 조선 여성들과는 다르게 바지를 입었으며, 짧은 저고리와 30cm 너비의 허리띠를 착용하였습니다.
- 주택 구조는 큰 방 하나로 이루어졌으며,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아 집 주변에 나무를 심지 않는 특성이 있었습니다.
결혼 풍습
혼인 규칙
- 초기에는 마을 내에서만 혼인이 이루어졌으며, 외부인과의 결혼은 제한되었습니다.
- 시간이 지나면서 외부인과의 혼인도 허용되었으나, 외지인이 재가승 여성과 결혼할 경우 반드시 재가승 마을에 들어와 살아야 했습니다.
특별 규정
- 외부 남성이 재가승촌 여성과 혼인하려면 고아이거나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허락되었습니다.
- 이러한 규정은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역사적 기원과 변화
기원설
재가승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합니다.
- 고려 시대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낸 후 남은 원주민들이 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설
-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대한 조공을 위해 여진족을 한 마을에 모아 살게 했다는 설
인구 변화
1935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재가승 인구는 563호, 총 3,323명이었으며, 주요 거주지는 함경북도 회령군 창두면 종암동과 온성군 미포면 월파동이었습니다. 점차 현대화되면서 공동체의 형태는 사라지고, 개별 가정 중심의 생활로 변화하였습니다.
결론
재가승은 독특한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특징을 가진 공동체로, 불교 신앙을 중심으로 한 생활방식과 사회제도를 유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일반적인 조선 사회와는 다른 특성을 보이며, 공동체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와 독특한 혼인 관습을 통해 정체성을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 속에서 점차 해체되었으며, 현재는 역사 속의 특수한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