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키 시게미의 정체와 배경
오자키 시게미는 1980년대 일본 음악계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오자키 유타카의 아내로, 1988년 5월부터 1992년 4월 오자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킨 인물입니다. 시게미는 오자키보다 2살 연하의 일반인 여성으로, 오자키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유일하게 꾸준히 면회를 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입양아 출신이라는 점인데, 이 사실은 오자키가 1991년 말까지 연재했던 자전적 소설에서 그녀의 동의 없이 폭로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시게미와 오자키의 첫 만남은 오자키가 미국으로 출국하기 하루 전에 열린 파티에서였습니다. 이 파티는 오자키의 고등학교 시절 불량배 친구였던 K와 그의 절친 T가 오자키를 위해 주최한 자리였으며, 시게미는 K와 T의 오랜 친구였습니다. 시게미의 저서 '친애하는 먼 당신에게'에 따르면, 첫날 오자키는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고, 다음날 파티에서 몇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나타나 처음 보는 시게미에게 다가가 "너 귀엽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예의 없는 태도에 시게미가 야단을 쳤지만, 이것이 두 사람의 인연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자키는 시게미에게 마음을 열 수 있었고, 그녀에게만큼은 "고민을 들어달라"며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부모님과 형이 있었지만 집에서도 어려운 존재였던 오자키에게 시게미는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시게미와 오자키의 만남과 배경
오자키 유타카는 1987년 약물 중독으로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되었고, 1988년 2월 집행유예로 출소하였습니다. 출소 후 같은 해 5월, 오자키는 수감 생활 동안 유일하게 꾸준히 면회를 와준 시게미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당시 오자키는 22세였으며, 시게미는 그보다 2살 어린 20세였습니다.
결혼 초기 두 사람은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고, 1989년 7월 24일에는 아들 오자키 히로야가 태어났습니다. 히로야 출산 직후까지만 해도 부부관계는 원만했으나, 오자키의 4집 앨범 발매 이후부터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게미의 출신 배경과 논란
시게미는 입양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매우 민감한 개인정보였습니다. 오자키는 1991년 말까지 연재했던 자전적 소설 '보통의 사랑'에서 시게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폭로했습니다. 이 폭로는 시게미를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고,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혼생활과 가정폭력의 실상
초기의 행복한 시절
결혼 초기 시게미와 오자키는 아들 히로야의 출산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듯 보였습니다. 시게미는 오자키가 구치소에 있을 때부터 변함없이 그를 지지했고, 출소 후에도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오자키 역시 시게미에게만큼은 마음을 열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시게미의 저서 '친애하는 먼 당신에게'에서는 오자키와 나눴던 행복했던 순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자키는 부모님이나 형에게는 말하기 어려웠던 내면의 고민들을 시게미에게는 털어놓았고, 그녀는 오자키를 이해하고 지지하려 노력했습니다.
소속사 갈등과 가정폭력의 시작
1988년 9월 1일 4집 앨범 '가로수'를 발표한 이후, 오자키는 소속사 마더 엔터프라이즈와의 심각한 마찰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오자키는 4집 앨범을 발매하고 싶지 않았지만 소속사의 압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발매했으며, 아내 시게미에게 "이런 음반은 한 장도 안 팔려도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불만이 컸습니다.
소속사와의 갈등, 마약 중독의 후유증, 그리고 '다른 소속사로 이적하려면 상당한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는 소속사의 압박 등으로 오자키는 나날이 피폐해져 갔습니다. 이러한 정신적 방황의 불똥이 부인 시게미에게 튀어, 오자키는 시게미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시게미는 오자키의 폭력을 견뎌냈고, 오자키는 폭력을 휘두른 뒤마다 울면서 사과하며 "절대 다시 때리지 않겠다, 마약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은 심지어 아기가 없었을 때 함께 수면제를 먹고 자살 시도를 하기도 했는데, 시게미는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가정불화의 심화
오자키와 시게미의 관계는 아들 히로야 출산 직후까지는 화목했으나, 4집 발매 이후부터 정신적으로 심하게 방황한 오자키가 시게미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막장 상태로 치달았습니다. 가정폭력은 점차 심해졌고, 결국 시게미는 오자키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하게 됩니다.
이혼 소송과 불륜 스캔들
이혼 소송의 시작
1990년부터 시작된 가정폭력과 오자키의 정신적 불안정으로 인해 시게미는 이혼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처음 시게미가 요구한 위자료는 3천만 엔이었습니다. 이혼 소송은 불륜 스캔들이 터지기 전에 이미 진행 중이었습니다.
사이토 유키와의 불륜 스캔들
1990년 11월, 오자키 유타카는 아이돌 가수 사이토 유키를 월간 카도카와 잡지에 실릴 대담을 목적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고, 곧 두 사람은 불륜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1991년, 오자키와 사이토 유키의 불륜 스캔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시게미와 오자키의 이혼 소송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불륜 스캔들이 터지자 시게미는 주변의 조언에 따라 원래 3천만 엔이었던 위자료를 3억 엔까지 올렸습니다. "이혼 사유가 불륜이니 위자료를 훨씬 더 받을 수 있을 거야"라는 친구의 조언을 따른 것입니다. 당시 오자키는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경제적으로 좋은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3억 엔이라는 거액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재결합과 소송의 무마
결국 이혼 소송은 어찌저찌 무마되고 이혼은 없었던 것으로 되었습니다. 이 합의금 문제 때문에 오자키 쪽에서 1991년 10월 즈음에 사이토 유키에게 결별 의사를 표시하며 관계를 마무리 지었다고 합니다. 1991년 10월, 오자키와 시게미는 재결합했습니다.
시게미는 이 시기 오자키가 사이토 유키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시게미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였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오자키 유타카의 의문사와 시게미의 역할
사망 당일의 행적
1992년 4월 24일 밤, 오자키 유타카는 부인 시게미, 그리고 시게미의 오랜 친구이자 오자키에게 시게미를 소개해준 T와 K와 함께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시게미는 1차 술자리까지만 일행과 함께 있다가, 오자키가 시게미에게 "친구들과 술 한잔 더 마실 테니 집에 들어가 있으라"고 말한 장면이 음식점 종업원들의 진술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오자키가 음식점에서 친구들과 마주치자 직접 시게미에게 술 한잔 더 마실 테니 먼저 돌아가라고 말한 장면이 CCTV와 종업원들의 진술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시게미는 오자키가 사망한 당일 1차 술자리에만 같이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1992년 4월 25일 새벽 5시 45분, 오자키 유타카는 도쿄 세타가야구의 한 민가 앞에서 전라 상태로 쓰러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시게미는 오자키가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지인들 중 가장 먼저 병원에 달려왔으며, 가장 먼저 병원에 연락해서 오자키를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의문사 논란과 시게미에 대한 의혹
시게미는 오자키가 사망한 이후 계속해서 오자키의 의문사 가능성을 완고히 부정했습니다. 사망 원인을 폐수종으로 계속 주장하며 의문사 가능성을 부정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당시 꽤 의혹을 불러일으켰고, 오자키의 몇몇 팬들은 아직까지도 "오자키는 시게미가 죽였다"라고 의심하는 상황입니다.
2007년 신문 인터뷰에서 시게미는 자신이 오자키가 민가 앞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지인들 중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오자키는 당시 병원에서 주사를 맞은 것을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고 놓은 것이라며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결국 연락을 받고 온 매니저와 함께 의사의 말에 따라 오자키를 집에 데려다 놓았는데, 직후 오자키가 시게미의 손을 붙잡고 "이겨낼 수 있을려나... 미안해"라는 말을 남긴 뒤 사망했다고 합니다.
방송 프로그램 고소 사건
오자키 사망 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시게미가 오자키를 죽였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그러자 시게미는 제작진을 고소하였고 재판에서 승소하여 프로그램이 폐지되었습니다. 시게미는 비록 오자키와의 이혼 소송이 진행 중이었고 오자키가 사망한 당일 1차 술자리에 같이 있긴 했지만, 오자키가 음식점에서 친구들과 마주치자 직접 시게미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말한 장면이 CCTV와 종업원들의 진술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후 유산 분쟁과 재판
시게미의 유산 상속과 회사 운영
오자키 사망 후 오자키의 모든 유산은 상속자인 시게미에게 돌아갔습니다. 처음부터 유산 분쟁은 없었으며, 오자키 유타카의 모든 재산은 시게미에게 상속되었습니다.
시게미는 오자키 사망 후 오자키의 형 야스시를 사장으로 고용했지만, 기획사에 T와 K를 데려와 오자키 가족들, 다이라쿠 매니저와 격렬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오자키 유타카가 죽고 난 뒤 시게미의 간곡한 부탁으로 오자키 유타카의 친형인 야스시와 매니저 다이라쿠는 오자키 사무소에서 밤낮없이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이나 장례식 뒷처리를 모두 도맡았습니다.
매니저 다이라쿠와의 소송
오자키의 마지막 매니저였던 다이라쿠 코타로는 시게미와 소송을 진행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퇴직금 관련 소송이었지만, 사실 이 재판의 본질은 오자키 유타카의 석연치 않은 죽음과 시게미의 회사 운영 방식, 퇴직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 규명이었습니다.
재판에서 시게미는 매니저 다이라쿠와 야스시 그리고 오자키 유타카 가족에 대해 비난을 일삼았지만, 재판장은 시게미의 주장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판단하여 그녀의 증언을 단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소송은 약 3년간 진행되었고 1995년 3월 16일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매니저 다이라쿠의 완전 승소로 끝이 났습니다.
다이라쿠는 재판에서 자신의 저서 '누가 오자키 유타카를 죽였는가'를 증거로 제출했고, 이 재판을 통해 책의 내용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피고인인 시게미의 반론은 온통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소송 이후의 행보
이후로도 시게미는 잡지 연재를 통해서 야스시와 다이라쿠를 계속 비난했습니다. 오자키 가족이 유산을 노리고 자신을 괴롭힌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으나, 애초부터 유산 분쟁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오자키 유타카의 모든 재산은 시게미에게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오자키의 형 야스시는 이러한 상황에 시게미에게 매우 분노했고, 소송을 걸려고 했으나 시게미가 오자키 유타카의 유일한 아들이자 야스시의 조카인 히로야를 방패로 내걸었습니다. 야스시는 동생이 남긴 유일한 친혈육의 성장 환경이 소송으로 인해 어지럽게 될 것을 염려하여 차마 시게미에게 소송을 걸지 못했습니다.
저서와 대중의 평가
'친애하는 먼 당신에게' 출간
시게미는 남편 오자키 유타카를 추모하며 '친애하는 먼 당신에게(親愛なる遠いあなたへ)'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에서 시게미는 오자키와의 만남, 결혼 생활, 그리고 함께 나눴던 순간들을 기록했습니다.
책에는 두 사람의 첫 만남 장면부터 시작하여, 오자키가 시게미에게 마음을 열고 고민을 털어놓았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시게미는 오자키가 "고민을 들어달라"며 자신에게만 속마음을 털어놓았고, 부모님이나 형에게는 말하기 어려웠던 내면의 고민들을 공유했다고 적었습니다.
또한 책에는 오자키의 폭력 문제, 마약 중독, 소속사와의 갈등 등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시게미는 폭력을 휘두른 오자키가 울면서 사과했고, 절대 다시 때리지 않겠다고, 마약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대중의 부정적 평가
일본 대중들 사이에서 시게미의 이미지는 매우 좋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생전에 오자키 유타카와 이혼 소송 과정에서 가정불화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둘째, 오자키가 직접 쓴 자전적 소설 '보통의 사랑'에 적혀 있는 시게미에 대한 내용들이 대중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셋째, 재결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자키 유타카가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게미가 남편을 추모하며 쓴 책인 '친애하는 먼 당신에게'에서 본인만 불쌍하고 가련한 여성인 척 한다는 점도 이미지 반감에 크게 한몫했습니다. 오자키 사후 시게미가 잡지 연재를 통해 야스시와 다이라쿠를 계속 비난한 것, 그리고 재판에서 거짓 증언을 일삼았다는 점도 부정적 이미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시게미는 추후 방송이나 본인 저서에서 이 일들에 관한 모든 발언을 거부했습니다.
아들 오자키 히로야의 양육
히로야의 성장 과정
오자키 유타카와 시게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오자키 히로야는 1989년 7월 24일에 태어났습니다. 히로야가 2살이었던 1992년 4월, 아버지 오자키 유타카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히로야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나 추억이 많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히로야는 5살 때부터 15살 때까지 미국에서 생활하여 영어가 유창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명문대학인 게이오기주쿠대학 환경정보학부를 졸업했습니다.
히로야의 음악 활동
히로야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노래를 쭉 듣고 자랐습니다. 시게미는 인터뷰에서 "히로야는 오자키 유타카의 순진한 팬이며,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면 17세의 지도를 부르곤 하였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히로야 본인도 "오자키 유타카가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오자키 유타카가 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2016년 9월 5일, 히로야는 정식 메이저 데뷔 싱글을 발표하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수로서 운명처럼 음악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목소리가 아버지 오자키 유타카와 정말 닮았으며, 특히 거칠고 허스키하기 전의 초창기 오자키 유타카의 목소리와 많이 비슷합니다.
2025년 6월 3일, 오자키 히로야는 엔터테인먼트 플랫폼 E-bo의 신서비스인 '본인 음악 노래방' 발표회에 등판하여 아버지의 대표곡 'I Love You'를 열창했습니다. 히로야가 열창하고 있는 동안 뒷편의 그림자가 아버지 오자키 유타카의 실루엣과 상당히 흡사하여 팬들은 하늘에서 아버지가 내려와 아들과 같이 듀엣을 하고 있다는 감동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시게미를 둘러싼 논란과 진실
T와 K의 의혹
시게미를 오자키 유타카에게 처음 소개해 준 장본인들이자 시게미와의 술자리가 파한 뒤 오자키 유타카와 만나서 같이 술을 마신 사람들, 즉 오자키 유타카가 알몸으로 발견되기 직전까지 오자키 유타카와 같이 있던 시게미와 오자키의 친구 T와 K의 발언과 행동들은 당시 상당히 논란이 되었습니다.
T는 시게미와 K의 절친이었지만 오자키 유타카와는 친하지 않았다고 하며, K는 오자키 유타카가 고등학교 시절에 같이 놀았던 불량배 친구로 대단히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오자키 유타카는 미국으로 출국하기 하루 전에 K와 T가 오자키를 위해 주최한 파티에서 부인인 시게미를 처음 만났습니다.
오자키 사망 후 시게미는 기획사에 T와 K를 데려와 오자키 가족들, 다이라쿠 매니저와 격렬하게 대립했습니다. 다이라쿠 매니저의 저서 '누가 오자키 유타카를 죽였는가'에 따르면, 시게미의 친구라고 주장하는 남자들로부터 협박성 전화를 받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문사 관련 증거와 반박
시게미가 오자키 사망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여러 반박 증거들도 존재합니다. 첫째, 오자키가 음식점에서 친구들과 마주치자 직접 시게미에게 술 한잔 더 마실 테니 먼저 돌아가라고 말한 장면이 CCTV와 종업원들의 진술로 확인되었습니다. 둘째, 시게미는 오자키가 쓰러진 채로 발견되자 가장 먼저 병원에 연락해서 오자키를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셋째, 병원에 가기 싫어한 오자키를 계속 병원에 보내려고 했었다는 점도 있습니다.
또한 시게미는 이 시기 오자키가 사이토 유키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시게미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였던 터라, 그런 와중에 갑자기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생전 오자키가 마지막으로 만났다고 확인되는 사람도 4월 24일 밤 같이 술자리를 가진 전 부인 시게미였으며, 그녀가 계속해서 오자키의 의문사 가능성을 완고히 부정했다는 점이 당시에 꽤 의혹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시게미의 현재와 침묵
2011년 유서 공개
2011년, 오자키 유타카가 남긴 두 개의 '유서'가 공개되었습니다. 시게미가 유독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이유가 밝혀졌는데, 그녀는 아들인 히로야가 성인이 되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밝히려고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2011년 시게미는 언론을 통해 유서 한 장을 공개했습니다. 오자키 유타카 유서에는 "이 전부터 죽고 싶었습니다"라는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발언 거부와 침묵
시게미는 추후 방송이나 본인 저서에서 오자키 사망과 관련된 일들에 관한 모든 발언을 거부했습니다. 매니저 다이라쿠와의 재판에서 패소한 이후, 시게미는 공개적인 언급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현재 시게미의 구체적인 활동이나 근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아들 오자키 히로야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수로 활동하고 있지만, 시게미 본인은 대중 앞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자키 유타카 사건의 역사적 의미
1990년대 일본 음악계의 충격
오자키 유타카의 의문사는 1990년대 일본 음악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980년대 일본 10대의 상징이었던 오자키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의 팬들은 물론 일본 사회 전체가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오자키의 발인은 사망 5일 후인 4월 30일에 치러졌으며, 무려 4만 명이 넘는 팬들이 조문을 위해 찾아왔습니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 오자키 유타카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의문사 논란의 지속
오자키 유타카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폐수종으로 인한 사망으로 발표되었지만, 사망 당시의 기묘한 상황들 때문에 자살설, 타살설, 사고사설 등 다양한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전라 상태로 발견된 점, 온몸의 상처와 멍, 사망 전날 밤의 행적 등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시게미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의심스러운 행동들이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시게미 관련 주요 사건 연대기
| 시기 | 주요 사건 |
|---|---|
| 1988년 2월 | 오자키 유타카 집행유예로 출소 |
| 1988년 5월 | 오자키 유타카와 결혼 (오자키 22세) |
| 1989년 7월 24일 | 아들 오자키 히로야 출생 |
| 1990년 | 오자키의 소속사 갈등으로 가정불화 시작, 가정폭력 발생 |
| 1990년 11월 | 오자키 유타카와 사이토 유키의 불륜 관계 시작 |
| 1991년 | 이혼 소송 제기, 위자료 3천만엔 → 3억엔으로 상향 요구 |
| 1991년 10월 | 이혼 소송 무마, 오자키와 재결합 |
| 1992년 4월 24일 | 오자키 사망 전날 밤 함께 술자리 (친구 T, K와 함께) |
| 1992년 4월 25일 | 오자키 유타카 의문사 (26세) |
| 1995년 3월 16일 | 오자키 매니저 다이라쿠와 소송 (시게미 패소) |
위 표는 시게미와 오자키 유타카의 관계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988년 결혼부터 1995년 재판까지 약 7년간의 격동의 시기를 보여줍니다.
결론: 논란의 중심에 선 여인
오자키 시게미는 일본 음악계의 전설 오자키 유타카의 아내로서, 그의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 했던 인물입니다. 구치소 수감 시절 유일하게 면회를 다녔고, 결혼 후에는 아들 히로야를 낳아 가정을 꾸렸습니다.
하지만 오자키의 소속사 갈등, 마약 중독, 가정폭력, 불륜 스캔들, 이혼 소송 등 격동의 시간을 거쳐야 했고, 결국 오자키의 의문사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사망 당일 오자키와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점, 의문사 가능성을 완고히 부정한 점, 사후 유산과 관련된 분쟁 등으로 인해 대중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매니저 다이라쿠와의 재판에서 패소하며 그녀의 주장이 거짓으로 판명된 점, 오자키의 형과 가족들을 비난했던 점 등이 이미지 악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게미가 오자키를 사랑했고, 그의 곁을 지키려 노력했다는 점은 그녀의 저서 '친애하는 먼 당신에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시게미는 대중 앞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생활하고 있으며, 아들 히로야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수로 활동하며 오자키 유타카의 음악적 유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시게미와 오자키 유타카의 관계, 그리고 그의 의문사는 여전히 일본 대중문화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사건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