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항(吳命恒, 1673~1728)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신으로, 1728년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분무공신 1등에 책록된 인물입니다. 그는 조선시대 마지막 1등 공신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탁월한 전략가이자 효성이 지극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나다
오명항은 1673년 5월 29일(음력 4월 14일) 해주 오씨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사상(士常), 호는 모암(慕菴) 또는 영모당(永慕堂)입니다. 그의 가문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명문가로, 고조부는 인조반정의 주역이자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吳允謙)이며, 외조부는 영의정 여성제(呂聖濟)입니다. 이처럼 양가 모두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이었습니다.
오명항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 오수량(吳遂良)을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어릴 때부터 글과 무예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전략과 전술에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형 오명준(吳命峻) 역시 병조판서를 지낸 인물로, 형제가 모두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성장했습니다.
관직 생활과 정치적 부침
오명항은 1705년(숙종 31)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며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급제 당시 그의 전체 석차는 8등으로 을과 5인에 해당하는 성적이었습니다. 1709년 교리(校理)를 거쳐 설서(說書), 사서(司書) 등을 역임했으며, 1710년 부수찬(副修撰), 1713년 겸필선(兼弼善), 1715년 부응교(副應敎)와 이조좌랑을 지냈습니다.
1715년 숙종이 소론을 여당으로 삼으면서 오명항은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716년에는 승지에 이어 경상도, 강원도, 평안도의 관찰사를 역임하며 지방 행정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1724년 영조가 즉위한 후 소론이 실각하자 오명항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집권 세력이 되면서 오명항은 지중추부사로 기용되었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연이어 역임했습니다. 병조판서 재직 당시 쌓은 군사적 경험과 전략·전술에 대한 식견이 훗날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인좌의 난 진압과 분무공신 책록
1728년(영조 4) 3월 15일, 소론 강경파인 이인좌(李麟佐)가 충청도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인좌는 청주를 점령하고 한양을 향해 북상했으며,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영조는 병조판서 오명항을 4도 도순무사 겸 판의금부사로 임명하여 반란군 진압을 명령했습니다. 이인좌 역시 소론 계열이었기 때문에, 영조는 소론이 스스로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습니다.
3월 20일 오명항이 지휘하는 관군은 경기도 진위군 남쪽에 주둔했습니다. 3월 24일 안성과 죽산 일대에서 관군과 반란군이 격돌했는데, 이 전투가 난의 향방을 결정짓는 결전이 되었습니다. 오명항은 탁월한 전략으로 반란군을 격퇴했습니다. 반란군이 관군을 동네 읍병으로 오인하고 총공격을 명령했다가 관군의 화포와 총기 공격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며 혼비백산하여 패주했습니다.
오명항은 이인좌가 산으로 도주하여 농성하자 부대를 3갈래로 나누어 습격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깃발과 창검을 내리고 북소리도 내지 말 것을 지시했으나, 일부 휘하 장수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 이인좌 군대가 더 험한 산꼭대기로 이동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명항은 공격을 개시하여 반란군을 격파했고, 이인좌는 갑주와 투구를 벗어 던지고 도주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안성·죽산 전투에서 반란군의 주력 부대를 격파하고 지도자들을 생포한 오명항은 파죽지세로 추풍령을 넘어 영남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는 영남의 반란군을 조기에 분쇄하여 호남의 역도들과 합세하지 못하게 차단했습니다. 약 한 달여 만에 난을 완전히 평정한 오명항은 4월 19일 개선했으며, 영조는 친히 숭례문에 나가 그를 영접했습니다.
이 공로로 오명항은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決機效力奮武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그는 조선시대 마지막 1등 공신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함께 난을 진압한 2등 공신으로는 박찬신, 박문수, 이삼, 조문명, 박필건, 김중만, 이만빈 등 7인이 책록되었으며, 특히 어사로 유명한 박문수가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습니다.
우의정 승진과 자책의 상소
이인좌의 난 진압 후 오명항은 우찬성에 승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와 같은 소론 당파라는 사실에 깊은 자책감을 느꼈습니다. 오명항은 상소를 올려 사임을 청했지만, 영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대광보국숭록대부 우의정으로 발탁했습니다. 이는 오명항의 충성과 능력을 인정한 영조의 특별한 신임을 보여주는 조치였습니다.
효성과 인품
오명항은 탁월한 군사적 능력뿐만 아니라 인품으로도 존경받던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효성은 매우 지극하여 조정에서 효자정문을 세워 기렸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자란 경험이 그의 효심을 더욱 깊게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신하들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던 덕망 있는 인물이었으며, 덕장(德將)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오명항의 시호는 충효(忠孝)로,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들었다"는 의미의 충(忠)과 "인자하고 은혜스러워 어버이를 사랑하였다"는 의미의 효(孝)를 합친 것입니다. 홍문관에서는 시호명을 충효, 효열, 충현으로 의정했고, 최종적으로 충효가 낙점되었습니다. 시호가 내려진 것은 1729년 5월 17일이지만 시호 행정은 그가 사망한 직후인 1728년 11월에 진행되었습니다.
초상화와 문화유산
오명항의 초상화는 보물 제1177호로 지정된 국가 문화재입니다. 이 초상화는 영조 연간에 제작된 것으로,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그려졌으며 세로 173.5cm, 가로 103.4cm의 크기입니다. 얼굴은 좌안팔분면(左顔八分面), 몸체는 구분면(九分面)으로 그려졌으며, 오사모(烏紗帽)에 짙은 녹색포를 입은 공수 자세(拱手姿勢)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倚坐像)으로 공신 도상의 전형적 형식을 보여줍니다.
초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인물의 사실적 묘사입니다. 얼굴에 그려진 얼룩 같은 검은 점들은 천연두(마마) 자국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며, 얼굴이 검은 것은 간질환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를 보여줍니다. 실제로 오명항의 사인은 간경변으로 추정되는데, 그의 집안은 선조 오도일부터 후손 오태증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애주가로 유명했습니다. 오명항의 초상은 장만의 초상 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사실주의 기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초상화와 함께 분무공신 교서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교서는 세로 42.9cm, 가로 289cm의 크기이며, 찬자는 신치근, 글씨는 조명교가 썼습니다. 이 유물들은 현재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추모와 기념
오명항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여러 곳에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에는 오명항 선생 토적송공비(討賊頌功碑)가 있는데, 이는 1728년 이인좌의 난을 토벌한 공적을 칭송한 비석입니다. 안성과 죽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장소 인근에 세워진 이 비석은 안성의 군관민이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입니다. 현재 이 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오명항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산5에 있습니다. 묘비는 정조 17년(1793)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돈령부사 이종성이 짓고 글씨는 조윤형이 썼습니다. 이곳은 해주 오씨 경파의 시조 묘역이 있는 곳으로, 오명항의 선조들과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역사적 의의와 평가
오명항은 1728년 10월 12일(음력 9월 10일)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인좌의 난을 신속하게 진압하여 영조의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반란군의 주력을 안성·죽산 전투에서 격파한 것이 난의 조기 진압을 가능하게 한 핵심 요인이었습니다.
그의 가문인 해주 오씨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명문가로, 문과 급제자 99명, 무과 급제자 267명, 생진사 326명을 배출했습니다. 특히 대제학 3명을 배출한 것은 매우 드문 일로, 사림들은 대제학 1명 배출이 삼정승 3명 배출과 대등하다고 여길 정도였습니다. 오명항은 이러한 명문가의 전통을 이어받아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성장했으며,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해주 오씨는 다른 소론 집안과 달리 탕평파의 입장을 취해 당파 싸움과 거듭되는 환국에도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오명항 역시 당파를 초월한 충성과 능력으로 영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이는 그가 조선의 마지막 1등 공신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습니다.
오명항은 뛰어난 전략가이자 충신, 그리고 효자로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초상화는 조선시대 사실주의 회화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과 묘소는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후대에 그의 업적을 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