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 여호수아 6장에 기록된 여리고성 함락 사건은 단순한 전쟁사가 아닙니다. 난공불락의 요새 앞에서 6일간 침묵하며 성을 돌고, 마지막 7일째 일곱 바퀴를 돌며 외친 함성이 어떻게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렸는지, 그 역사적 배경과 영적 의미, 그리고 현대인에게 주는 교훈까지 심층 분석합니다.
역사적, 지리적 배경 : 난공불락의 요새 여리고
여리고(Jericho)는 요단강 서쪽, 사해 북서쪽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입니다. 당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리고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자, 반드시 넘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지리적 중요성과 방어 체계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약 250m 낮은 곳에 위치하여 기후가 온화하고 종려나무가 무성한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이 풍요로움 때문에 여리고는 외세의 침입에 대비하여 강력한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당시 여리고성은 이중 성벽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 외벽: 높이 약 4
5m의 기초 성벽 위에 다시 두께 2m, 높이 68m의 진흙 벽돌 성벽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 내벽: 외벽 안쪽의 가파른 경사지 위에 또 다른 높은 성벽이 있어, 적이 외벽을 뚫더라도 내벽을 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황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정규 훈련을 받은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공성퇴나 투석기 같은 공성 무기가 전무했습니다. 오직 광야 생활을 거친 백성들과 그들의 지도자 여호수아뿐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이 전쟁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는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전술 : 침묵과 행진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일반적인 군사 전술과는 전혀 다른,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싸우라'는 것이 아니라 '돌라'는 것이었습니다.
행진의 대형과 순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행진의 순서는 매우 엄격하고 질서 정연했습니다.
- 무장한 군사들 (선발대): 행렬의 맨 앞에서 길을 엽니다.
- 일곱 제사장: 양각 나팔(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 Shofar)을 잡고 붑니다.
- 하나님의 언약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제사장 뒤를 따릅니다.
- 후발대: 무장한 군사들이 언약궤 뒤를 호위하며 따릅니다.
이 행렬의 중심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이는 전쟁의 주권이 인간의 무력이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배치였습니다.
침묵의 명령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여호수아 6:10)
가장 힘든 명령은 바로 '침묵'이었습니다. 수십만 명의 장정들이 성을 도는 동안,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 그리고 제사장의 나팔 소리 외에는 어떤 말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부정적인 말이나 불평, 인간적인 잡담을 차단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하려는 영적 훈련이었습니다.
6일간의 인내 : 믿음의 발걸음
첫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성을 한 바퀴씩 돌았습니다.
반복되는 순종의 테스트
매일 한 바퀴를 돌고 진영으로 돌아오는 일은 겉보기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성벽에 금이 가는 것도 아니었고, 적들이 항복해 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 여리고 군사들의 조롱: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여리고 군사들은 활을 쏘거나 공격하지 않고 매일 성만 돌고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조롱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내면의 싸움: "이게 과연 효과가 있을까?", "우리가 지금 뭐 하는 것인가?"라는 내면의 의심과 싸우며 묵묵히 걷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싸움이었습니다.
운명의 7일째 : 일곱 바퀴와 함성
마지막 7일째, 명령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한 바퀴가 아니라 일곱 바퀴를 돌아야 했습니다.
극에 달한 긴장감과 육체적 피로
여리고성의 둘레는 약 600m 정도로 추정됩니다. 7바퀴를 돈다는 것은 약 4km 이상을 행진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6일간 쌓여온 긴장감과 마지막 날의 비장함이 군중을 압도했을 것입니다. 일곱 바퀴를 도는 동안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고, 성 안의 공포감도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믿음의 함성 (The Great Shout)
일곱 번째 바퀴를 다 돌았을 때,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그 순간, 온 백성이 일제히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선포하는 승리의 함성이었습니다. 그 순간 거대한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성경은 성벽이 무너져 내린 후 백성들이 '각기 앞으로(straight ahead)' 나아가 성을 점령했다고 기록합니다.
고고학적 증거와 논쟁 : 성경의 역사성
여리고성 함락은 오랫동안 고고학계의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20세기 초 캐슬린 케년(Kathleen Kenyon)은 여리고성이 이미 그 이전에 파괴되었다고 주장했으나, 이후 브라이언트 우드(Bryant Wood) 박사 등의 연구를 통해 성경의 기록과 일치하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났습니다.
무너진 성벽의 형태
발굴 결과, 여리고성의 성벽은 바깥쪽으로 무너져 내린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 일반적인 공성전에서 성벽은 밖에서 안으로 밀려 무너집니다.
- 그러나 여리고성 성벽은 마치 내부에서 폭발하거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바깥쪽으로 무너져 내려, 그 잔해들이 자연스럽게 경사로(ramp)를 형성했습니다.
- 이로 인해 이스라엘 군사들이 성벽 잔해를 밟고 곧장 성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수 6:5)는 말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불타버린 곡식 항아리
여리고 유적지에서는 불에 탄 곡식이 가득 담긴 항아리들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합니다.
- 단기간의 전쟁: 곡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포위 기간이 짧았다는 증거입니다(성경의 7일 기록과 일치).
- 추수 시기: 당시가 보리 추수 시기(유월절 즈음)였음을 보여줍니다.
- 약탈 금지 명령: 고대 전쟁에서 곡식은 가장 중요한 전리품입니다. 승자가 곡식을 가져가지 않고 태워버렸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데, 이는 여호수아가 내린 "모든 것을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고 손대지 말라"(헤렘)는 명령을 백성들이 철저히 지켰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라합의 구원과 붉은 줄
이 처참한 심판의 현장에서도 구원의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기생 라합과 그녀의 가족입니다.
붉은 줄의 의미
정탐꾼들을 숨겨준 대가로 라합은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아 구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성벽이 무너져 내릴 때, 성벽 위에 위치했던 라합의 집이 있던 부분만은 기적적으로 보존되었습니다. 이는 심판 중에도 믿음을 가진 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줍니다. 라합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복음 1장)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현대인에게 주는 영적 교훈과 적용
여리고성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강력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라
우리의 이성으로는 매일 성을 도는 것이 시간 낭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내 논리와 경험을 내려놓을 때 기적이 시작됩니다.
침묵의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문제 앞에서 너무 말이 많습니다. 불평, 원망, 부정적인 예측을 쏟아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침묵을 명하십니다. 잠잠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것, 입술을 지키는 것이 영적 승리의 비결입니다.
끝까지 인내하라 (임계점의 법칙)
6일째까지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7일째 6바퀴를 돌 때까지도 성벽은 멀쩡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한 바퀴를 남겨두고, 혹은 마지막 함성을 지르기 직전에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임계점(Critical Point)'을 넘을 때 일어납니다. 13바퀴를 다 채우는 끈기가 필요합니다.
요약 비교표 : 인간의 전략 vs 하나님의 전략
| 구분 | 인간의 전략 (일반적 전쟁) | 하나님의 전략 (여리고 전쟁) |
|---|---|---|
| 무기 | 칼, 창, 공성퇴, 투석기 | 양각 나팔, 언약궤, 믿음 |
| 방법 | 토성 쌓기, 성문 부수기, 기습 | 매일 성 돌기 (행진), 침묵 |
| 소리 | 전투 고함, 비명, 지휘관의 고성 | 나팔 소리(예배), 침묵 후 일제 함성 |
| 기간 | 수개월 ~ 수년 소요 | 딱 7일 |
| 결과 | 많은 사상자 발생, 부분적 파괴 | 아군의 피해 없음, 성벽의 완전한 붕괴 |
| 목적 | 영토 확장, 약탈 | 하나님의 주권 선포, 죄악 심판 |
여리고성 함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이스라엘의 순종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기적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여리고'는 무엇입니까?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문제 앞에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 순종하며 나아갈 때, 가장 견고한 벽도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