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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얼 뜻 : 양반의 자손 중 첩의 소생과 그 자손을 뜻하는 조선시대 신분 계급

by 지식한입드림 2025. 10. 25.

서얼의 정의와 의미

서얼(庶孼)은 조선시대 신분 계급 중 하나로, 양반 남성과 첩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과 그 후손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서얼이라는 단어는 '서(庶)'와 '얼(孼)'의 합성어로,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서(庶)'는 양인(良人) 신분인 첩이 낳은 자식인 서자(庶子)를 의미하며, '얼(孼)'은 천민(賤民) 신분인 첩이 낳은 자식인 얼자(孼子)를 뜻합니다. 이처럼 서얼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세분화되었으며, 이 두 부류를 통틀어서 서얼이라고 불렀습니다.

서얼이라는 용어 자체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서(庶)'는 첩의 자식이나 자손이라는 의미 외에도 벼슬이 없는 사람이나 '천하다', '제거하다'라는 뜻이 있으며, '얼(孼)'에는 재앙이나 근심, 천민, 불효, 사악하고 폐를 끼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단어 자체에 이미 나쁘고 천하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깔려있어, 서얼이라는 명칭부터 차별의 의도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서얼의 신분적 지위와 특성

서얼은 조선시대 신분 제도 안에서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양반이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양반에 속했지만, 사회적으로는 중인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서자가 양반인 아버지로부터 자녀라고 인지를 받아 정식으로 족보에 이름이 올랐을 때에는 법적으로 양반 신분이었으나, 실제 사회생활에서는 적자와 달리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서얼 신분의 가장 큰 특징은 이것이 대대로 물려진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어머니가 정실부인이어도 아버지가 서자라면, 즉 할머니가 측실이면 자신도 서얼로 분류되었습니다. 정조 시대 유명한 규장각 한학 4가인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중에 박제가를 제외한 3인의 어머니는 당당한 정실부인이었으나, 할머니나 증조할머니 또는 먼 윗대의 할머니 중 한 분이 첩이었기 때문에 서얼로 분류되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 때문에 서얼의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얼 차별의 시작과 역사적 배경

서얼 차별은 조선 초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조선 태종 시대 문신 서선이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정도전이 서자라는 이유로 서자를 차별하자고 처음 주장했고, 태종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강력한 서얼 차별이 시작되었습니다. 태종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형제들을 죽이고 왕권을 차지했는데, 그 명분과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적서를 엄격히 따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철저한 부계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얼의 경우에는 모계를 따라 신분을 정했습니다. 비록 아버지가 양반이라고 해도 어머니가 양민이면 양민이었고, 천민이면 천민이었습니다. 이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라 적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족과 사회에서 차별 대우를 받게 만든 제도적 장치였습니다.

서얼 인구의 증가와 사회적 영향

서얼의 수가 급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본부인은 1명이지만 첩은 여러 명일 수 있었기 때문에 시작부터 숫자가 많았습니다. 둘째, 서얼 신분이 대대로 물려지면서 서얼 집단과 계층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6세기 말과 17세기 전기에 걸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가족의 이산으로 많은 사족 가문에서는 본처가 있는데도 처를 얻어 중혼 관계에 놓인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서얼 인구가 증가하면서 이들은 점차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서얼의 개념 속에는 양반의 첩자녀와 그 자손은 물론 아버지가 양반이더라도 어머니 쪽에서 한 가닥이라도 양반이 아닌 혈통에 연결되어 있다면 이도 서얼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총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서얼금고법과 구체적인 차별 내용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은 조선시대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게 한 제도입니다. 서얼들은 과거 응시는 가능했으나 문과시험 응시는 불가능했으며, 무과나 잡과만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수많은 인재들을 관직으로부터 소외시켜버리는 문제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서얼들은 아버지가 양반인 덕분에 글공부를 할 수 있었고, 교육 기회도 있었지만 과거를 통한 관직 진출이 제한되었습니다. 지역 사족임을 상징하는 향교와 서원 출입도 제한되었으며, 아버지가 누렸던 모든 권리가 서얼들에게는 제한되었습니다. 재산 상속에 있어서도 차별이 있었으며, 같은 아버지를 둔 정실부인의 형제들로부터도 차별을 받았습니다.

서얼허통 운동의 전개

서얼 차별의 폐해로 인재 등용의 어려움을 인식한 관리들에 의해 서얼통청론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중종 때 조광조가 서얼통청론을 처음 제안했으며, 조선 중기를 거쳐 선조 때에는 서얼의 차별을 잠시 완화하여 음관(蔭官)으로 지방의 수령(守令) 등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재정난으로 임시적으로 납속을 통한 통청이 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인조부터 숙종 때에 서얼들의 집단 상소와 그에 대한 허통에 대한 논의가 거듭되었습니다. 1695년 숙종 대에는 영남지방 서얼들이 상소를 올리며 차별을 철폐해줄 것을 호소했고, 송시열, 박세당, 김수항 등이 서얼허통운동을 벌였습니다. 이에 숙종이 동의하여 허통을 명하였으며, 납미부거법(納未赴擧法)을 폐지하여 납속 절차 없이도 문무과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조와 정조의 서얼 차별 혁파 정책

영조는 무수리 출신 친어머니를 두었고 정통성에 대한 지적을 많이 받았던 왕이었기에 서얼 문제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1772년 영조 48년에 서얼 3000명이 상소를 올리자 통청윤음(通淸綸音)을 반포하여 서얼들이 청요직에도 진출할 기회를 열어주었습니다. 또한 서얼도 아버지를 아버지로, 형을 형으로 부를 수 있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법률로 다스리도록 하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정조는 아버지 영조의 정책을 계승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서얼 차별을 혁파하고자 했습니다. 1777년 정조 1년에 서류허통절목(庶流許通節目)을 공표하여 서얼 중에서 "뛰어난 재주를 지닌 선비"와 "나라에 쓰임이 될 만한 사람"을 임용하라고 명했습니다. 정유절목(丁酉節目)을 반포하여 서얼들이 고위 일부 문무관직까지 승진할 수 있도록 제한을 없앴습니다.

정조는 규장각에 검서관 제도를 신설하여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의 서얼들을 대거 등용했습니다. 이들은 규장각 4검서로 불리며 조선 후기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정조의 서얼허통정책은 "백성은 나의 동포"요, "한 집 식구"로 보는 정조의 백성관에서 비롯되었으며, 유능한 인재를 고루 등용한다는 임용방침에 따라 취해진 것입니다.

순조 이후 서얼 차별의 지속적 완화

순조 대에는 대단위의 허통 요청을 계미절목(癸未節目, 1823년)으로 승인함으로써 많은 부분에서 서얼 차별을 줄여 나갔습니다. 이후 헌종, 철종 등의 왕들도 서얼허통소(庶孼許通疏), 신해허통 등을 통해 사헌부, 승정원 등의 관직에 서얼이 진출할 수 있게 하거나 종2품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하는 등 지속적으로 차별정책을 완화해나갔습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서얼들의 운동방법도 격렬해졌습니다. 철종 10년에 서얼 유생들이 발송한 통문을 보면, 그들은 친생자가 있음에도 적출이 아니면 양자를 들이는 부모들에 대해 거듭 간하되 듣지 않으면 머리를 땅에 부딪쳐서 피 흘리며 간하라고 할 정도로 격렬했습니다. 이 시기의 서얼금고는 법제상으로 상당히 완화되어 서얼도 청환(淸宦)으로 임용될 수 있었고 후사에 있어서도 서얼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서얼 출신 인물들

조선시대에는 서얼 출신임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정조 시대의 규장각 4검서인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서이수(徐理修)가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청나라 학자들도 인정한 수재들이었으나 조선에서는 서얼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있다가 정조의 특명으로 등용되었습니다.

이덕무는 어머니가 정실부인이었지만 윗대가 서얼이었기에 서얼로 분류되었습니다. 유득공도 양반가 자손이지만 윗대가 서얼이었기에 대대로 서얼끼리 혼맥을 맺어 이루어진 집안 출신으로 관직 진출에 제한이 있었습니다. 유득공은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문과에는 계속 낙방했는데, 그의 출신 배경이 낙방의 원인임을 깨닫고 문과를 접고 여행을 떠났으며, 이것이 그로 하여금 「21도회고시」를 쓰게 하고 역사 지리에 더욱 관심을 갖게 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박제가는 4검서 중에서도 특히 유별난 인물로, 다른 3명은 키도 크고 잘생기고 성품도 원만했지만 유독 박제가만 못생기고 성격이 모났다고 전해집니다. 그럼에도 정조는 박제가를 진정으로 아꼈으며, 그의 단점까지 포용하고 총애했습니다. 이들은 1776년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편집하여 청나라에 보냈는데, 이 책은 청나라의 이조원과 반정균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외에도 서얼로서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 여러 임금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갈아타기의 귀재' 유자광도 있었습니다. 유자광은 서얼 출신이었지만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높은 관직에 올랐던 인물입니다.

서얼 제도의 역사적 의미와 변화

서얼 제도는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노비법과 함께 신분제의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는 부분이었습니다. 서얼들은 아버지가 사족인 덕분에 글공부도 할 수 있었고 신분제의 불합리성을 생각할 여유도 있었기 때문에, 서얼이야말로 신분 차별에 가장 각성한 집단이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얼들의 상속상의 지위도 상승했습니다. 상당수의 가문에서는 적자가 없을 경우 전처럼 양자에게 대를 잇도록 하지 않고 친생자인 서얼로 적통을 이어 후계를 삼아 재산상속을 시켰습니다. 후대로 가면서 서얼들이 공경대부의 자리를 많이 차지하게 되자 여러 가문에서 서얼들을 '승적'시켜서 후사로 삼았습니다.

과거에 허통 후 응시할 때는 반드시 '허통(許通)'으로 녹명하도록 했으나, 당시 서얼들은 녹명 규정을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규정이 서얼 본인에게만 해당되며 그들의 자손은 반드시 '허통'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후기에는 미허통 서얼의 불법적인 과거 응시도 빈번했으나 국가에서도 별다른 대책이 없었습니다.

맺음말

서얼 제도는 조선시대 신분 제도의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아버지가 양반이면서도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차별받았던 서얼들은 조선 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집단으로 성장했으며, 지속적인 허통 운동을 통해 점차 그들의 권리를 찾아갔습니다. 영조와 정조를 비롯한 개혁적인 군주들의 노력으로 서얼 차별은 점차 완화되었고, 이들 중 많은 인재들이 조선 후기 학문과 정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서얼 제도의 역사는 신분 차별에 대한 저항과 개혁의 역사이자,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