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살리에리는 1750년부터 1825년까지 활동한 이탈리아 출신의 고전주의 작곡가로, 36년간 오스트리아 빈의 궁정악장을 역임하며 베토벤과 슈베르트를 비롯한 수많은 음악 거장들을 길러낸 당대 최고의 음악 교육자입니다. 43편의 오페라를 작곡하고 종교음악과 기악곡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나, 영화 '아마데우스'로 인해 모차르트를 질투한 인물로 오해받고 있습니다.
살리에리의 생애와 음악적 여정
이탈리아에서 빈 궁정까지의 성장 과정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1750년 8월 18일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의 레냐고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형 프란체스코에게 쳄발로와 바이올린을 배우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1763년과 1764년 사이 부모를 모두 여의는 불행을 겪으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이후 이탈리아 각지를 떠돌며 생활해야 했습니다.
1765년 또는 1766년 베네치아에서 살리에리의 운명을 바꾸는 중요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빈의 궁정작곡가였던 플로리안 레오폴트 가스만이 살리에리의 재능에 감명을 받아 그를 빈으로 데려가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1766년 6월 15일, 가스만은 교회에서 성별 의식을 거쳐 공식적으로 살리에리의 스승이 되었으며, 이 경험은 살리에리의 평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빈에서 살리에리는 요한 푹스의 고전 대위법을 바탕으로 하는 화성학과 대위법 이론, 성악 작곡법을 체계적으로 배웠습니다. 또한 당대 오페라 개혁의 선구자였던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의 비공식적인 제자가 되어 새로운 오페라 스타일을 흡수했습니다. 이러한 교육은 살리에리가 이탈리아 전통을 넘어서는 국제적인 작곡가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빈 궁정악장으로서의 화려한 경력
살리에리의 음악 경력은 탁월한 성공의 연속이었습니다. 1770년 스무 살의 나이에 발표한 오페라 '아르미다'는 타소의 서사시를 바탕으로 한 3막짜리 오페라 세리아로, 이미 륄리, 헨델, 글루크 같은 대작곡가들이 다룬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압축된 구성과 생생한 극음악으로 초연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1774년, 24세의 살리에리는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에 의해 빈의 궁정작곡가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음악가로서 매우 이례적인 빠른 출세였습니다. 그리고 1788년, 38세의 나이에 살리에리는 궁정악장이라는 오스트리아 제국 음악가 최고의 직위에 올랐습니다. 이 지위는 황실의 예배와 음악교육을 총괄하는 막중한 책임을 수반하는 자리였습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살리에리가 1788년부터 1824년까지 무려 36년간 이 최고 지위를 유지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기간 동안 왕이 여러 번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뛰어난 음악적 능력과 원만한 성품을 증명합니다. 살리에리는 죽기 1년 전인 1824년까지 궁정악장 직을 수행했으며, 이는 당대 빈 음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작곡가로서의 왕성한 활동과 만년의 변화
살리에리는 일생 동안 왕성한 작곡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총 43편의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이 중 대부분이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1784년 글루크와 공동으로 작곡한 오페라 '다나이드'는 파리에서 초연되어 세간의 찬사와 함께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787년에는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오페라 '타라르'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보다 빈 사람들에게 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살리에리의 음악적 특징은 글루크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기교보다는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창법을 지향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3개 국어로 오페라를 작곡하며 국제적인 작곡가로 활동했습니다. 이는 18세기 오페라 발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업적으로, 당대 오페라 창작에 활용되는 어휘 및 표현을 발달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804년 마지막 오페라 공연을 끝낸 후, 살리에리는 점차 오페라 작곡에서 손을 떼고 종교음악 작곡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미사곡, 레퀴엠, 오라토리오 등 다양한 종교음악을 남겼으며, 실내악곡과 협주곡, 교향곡 등의 기악곡도 작곡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살리에리는 작곡보다 음악 교육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고, 이는 음악사에 더욱 큰 족적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음악 교육의 거장으로서의 살리에리
역사상 최고의 제자 라인업을 배출한 스승
살리에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음악 교육자로서의 역할입니다. 그가 가르친 제자들의 명단을 보면 음악사를 빛낸 거장들이 즐비합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살리에리에게 오페라를 비롯한 성악 작법과 대위법을 배웠으며, 편지와 대화록에서 살리에리에 대한 존경심을 자주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베토벤은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을 살리에리에게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의 경우,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살리에리의 눈에 띄었습니다. 살리에리는 슈베르트의 뛰어난 음악성을 발견하고 빈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직접 주선했으며, 슈베르트가 빈 음악원을 졸업한 뒤에도 3년 동안이나 그가 보낸 작품을 살펴보고 섬세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슈베르트의 전기 속에서 살리에리는 고마운 선생님으로 그려집니다.
그 외에도 프란츠 리스트, 카를 체르니, 요한 네포무크 훔멜, 지아코모 마이어베어 등 쟁쟁한 음악가들이 살리에리의 제자였습니다. 심지어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프란츠 자버 쥐스마이어와 모차르트의 아들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 모차르트도 살리에리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라는 세 거장이 모두 한 스승 밑에서 배웠다는 사실은 음악 역사상 최고의 제자 라인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선가이자 교육자로서의 헌신
살리에리의 교육 활동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그의 자선적 성격입니다. 그는 재능은 있지만 돈이 없는 젊은 음악가들을 무료로 가르쳤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무명 시절 궁핍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던 살리에리가 온화하고 대인배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살리에리는 실직한 음악가와 사망한 음악가의 유족들을 위해 상조회를 조직하고, 자선 콘서트를 매년 개최하는 등 물질적·정신적으로 당대 후배 지수들을 위해 엄청난 투자와 열의를 보인 자선가였습니다. 1818년까지는 '음악예술가협회' 지휘자를 겸임하며 음악계 전체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보수적이지만 체계적인 교육 방법
살리에리의 교육 방법은 보수적 스타일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요한 푹스의 고전 대위법을 기반으로 한 철저한 이론 교육을 강조했으며, 특히 성악 작곡의 교사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베토벤이 성악 작곡의 교사로 살리에리를 선택한 것도 이러한 명성 때문이었습니다.
슈베르트의 초기 미사음악 작품들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비엔나 고전주의 음악의 영향뿐만 아니라 살리에리의 영향까지 보여줍니다. 이는 살리에리가 체계적이고 전통적인 음악 교육을 제공했음을 증명합니다. 그의 제자들이 각자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살리에리가 탄탄한 기초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와의 관계와 독살설의 진실
실제로는 동료이자 협력자였던 두 음악가
영화와 대중문화에서 살리에리와 모차르트는 적대 관계로 묘사되지만, 역사적 사실은 전혀 다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는 동료 음악가였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1785년에 두 사람이 함께 작곡한 작품의 존재입니다. 230여 년 만인 2016년에 발견된 칸타타 '오필리아의 건강을 위하여'는 살리에리, 모차르트, 그리고 '코르네티'라는 미상의 음악가가 공동으로 작곡한 약 4분 길이의 성악곡입니다.
이 작품은 3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목가적 스타일의 첫째 부분은 살리에리가, 행진곡풍의 둘째 부분은 모차르트가 작곡했습니다. 독일 출신 음악학자 티모 유코 헤르만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빈에서 활동하던 시절 살리에리가 작곡을, 모차르트는 피아노 연주를 맡는 식으로 공동 작업을 하곤 했다"며 "이번에 발견된 작품은 두 작곡가 사이의 친근한 관계를 보여주는 결과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살리에리는 황제 요제프 2세 앞에서 자신의 작품이 아닌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하여 공연했으며, 1790년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에서도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를 연주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경쟁자를 질투하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모차르트 독살설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모차르트가 1791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빈에서는 여러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모차르트 자신도 사망하기 전 몇 개월 동안 두통과 전신 통증에 시달리면서 누군가 자기에게 독약을 먹였을 것으로 의심했다고 합니다. 쇠약해진 모차르트의 상상력이 만든 판타지였지만, 다리에서 발견된 종양이 중독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의사 소견이 더해지면서 독살설은 더욱 퍼져나갔습니다.
흥미롭게도 모차르트에게서 질투의 감정을 느낀 것은 오히려 살리에리가 아니라 모차르트 자신이었습니다. 당시 성공한 음악가 살리에리에게 번번이 밀리던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쓰는 편지에서 살리에리를 향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황제의 눈에 든 인물은 살리에리 한 명뿐이에요", "대본작가 다 폰테가 살리에리와만 일하려 해요"라는 식의 내용이었습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풍문은 이미 모차르트 사후에 돌았고, 줄곧 부인하던 살리에리는 말년에 정신착란에 빠진 뒤 "내가 그를 죽였다"는 말을 내뱉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치매로 인한 것으로, 치매가 이미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작곡가를 덮치면서 소문이 사실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모차르트가 보인 증상은 중독 증상과 거리가 멀었으며, 현재는 독살설이 거짓임이 밝혀졌습니다.
왜 살리에리가 용의자가 되었나
역사적으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보다 훨씬 지위가 높았으며, 독살할 동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음악가로는 오스트리아 최고 자리에 올라 있었던 그가 신인 모차르트를 독살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모차르트가 죽은 후 그의 미망인 콘스탄체가 아들 프란츠 크사버 모차르트를 살리에리에게 맡겨 음악을 배우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독살설에 근거가 있었다면 모차르트의 아들이 살리에리의 제자가 되었을 리 없습니다.
독살설이 계속 회자된 것은 모차르트의 불합리한 죽음과 살리에리 사이의 불편한 관계가 극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내기에 좋은 소재였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1830년에 발표한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이 소문을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켰고, 림스키-코르사코프가 1898년 이를 오페라로 만들면서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1984년 밀로스 포만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가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면서 살리에리는 질투의 화신이라는 이미지로 완전히 고착되었습니다.
살리에리의 대표 작품과 음악적 특징
오페라 작품의 성공과 다양성
살리에리는 평생 43편의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이 중 대부분이 당대에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오페라는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3개 국어로 작곡되었으며, 파리, 로마, 베네치아 등 유럽 전역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되었습니다.
1771년 스무 살에 발표한 '아르미다'는 타소의 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을 바탕으로 한 3막짜리 오페라 세리아로, 십자군 전사 리날도와 마법사 아르미다의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탄탄한 음악적 구성력과 전달력으로 초연 때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1784년 글루크와 공동으로 작곡한 '다나이드'는 파리에서 초연되어 세간의 찬사를 받았으며, 살리에리의 오페라 중 가장 성공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힙니다. 1787년 발표한 '타라르'는 일반적으로 그의 가장 훌륭한 업적으로 여겨지는 걸작입니다. 이 작품은 대혁명을 앞두고 불안한 정치 상황을 절묘하게 반영한 작곡으로, 왕의 권위를 위협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음에도 궁정음악가로 임명된 것은 이례적이었습니다.
종교음악과 기악곡의 업적
말년에 살리에리는 종교음악 작곡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미사곡, 레퀴엠, 오라토리오 등 다양한 종교음악을 남겼으며, 그의 장례식에는 그가 작곡한 레퀴엠이 연주되었습니다. 살리에리의 종교음악은 전통적인 형식을 따르면서도 깊은 종교적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기악곡 분야에서도 살리에리는 협주곡, 교향곡, 세레나데, 행진곡, 실내악곡 등을 작곡했습니다. 그러나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완벽한 고전주의적 형식 원리를 응용한 소나타와 협주곡, 교향곡을 쏟아낸 반면, 살리에리의 기악 작품들은 긴 구조를 효율적으로 쌓아올릴 수 없는 지난 시대의 '갈랑 스타일'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는 살리에리가 주로 오페라와 성악 작곡에 강점을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글루크 스타일의 계승과 발전
살리에리의 음악적 특징은 그의 스승인 글루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입니다. 글루크는 오페라 개혁의 선구자로, 화려한 기교보다는 드라마의 진실성과 표현을 중시했습니다. 살리에리는 이탈리아 출신이었지만 정통 이탈리아 오페라 스타일을 답습하기보다는 글루크를 필두로 한 새로운 경향의 오페라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살리에리의 오페라는 이탈리아 본토의 오페라처럼 화려하고 기교가 넘치는 아리아가 적은 대신, 좀 더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창법을 갖는 아리아가 많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당대 오페라 창작에 활용되는 어휘 및 표현을 발달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동시대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살리에리 증후군과 문화적 영향
심리학 용어가 된 살리에리의 이름
'살리에리 증후군'은 주변의 뛰어난 인물 때문에 느끼는 열등감, 시기, 질투심 등의 증상을 이르는 말로, 2인자의 심리 상태를 표현할 때 쓰이는 용어입니다. 이 용어는 다른 사람의 탁월한 재능을 질투하며 자신이 열등하다고 느끼는 심리 상태를 의미하며, 특히 자신의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주변의 뛰어난 사람들과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낄 때 사용됩니다.
살리에리 증후군의 주요 특징으로는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 인정 욕구의 과도한 증가, 성취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경향 등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성과와 성공을 매우 중시하며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이러한 증후군은 학교, 직장, 예술 분야에서 흔히 나타납니다. 특히 SNS와 미디어가 다른 사람들의 성공적인 삶을 강조하면서 이 증후군은 더욱 악화될 수 있습니다.
문학과 영화 속 살리에리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관계는 수많은 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1830년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발표한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예술 창조의 문제를 깊게 성찰한 작품으로, 노력파 음악인 살리에리와 신의 은총을 받은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 사이의 갈등을 다룹니다. 푸시킨은 예술성과 인간성을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의 통합체로 보았습니다.
1898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푸시킨의 희곡을 바탕으로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작곡했습니다. 1979년에는 영국 작가 피터 섀퍼가 희곡 '아마데우스'를 발표했고, 1984년 밀로스 포만 감독이 이를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아카데미상 8개 부문을 휩쓸며 전 세계적으로 흥행했으며, 2019년 미국 국립영화등기부에 등재되었습니다.
영화에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천재적 재능을 시기한 나머지 열등감에 시달리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인물로 묘사됩니다. 신부에게 고백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는 "욕망을 갖게 했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지"라는 명대사로 유명합니다. 한국에서도 2014년 창작 뮤지컬 '살리에르'가 초연되어 살리에리의 내면을 깊이 있게 다루었습니다.
역사적 진실의 왜곡과 재평가의 움직임
아이러니하게도 살리에리를 비운의 인물로 만든 것은 문화 작품들의 성공이었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 이후 살리에리는 질투의 화신, 모든 평범한 이의 챔피언이라는 이미지로 고착되었고, '살리에리 증후군'이라는 심리학 용어까지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은 36년간 빈의 궁정악장이었던 살리에리의 음악보다 36세 짧은 생을 마감한 모차르트의 음악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최근 음악계와 학계에서는 살리에리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2016년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공동 작품이 발견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라이벌이 아닌 동료에 가까웠다는 학계의 정설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습니다. 2021년에는 살리에리의 '아르미다' 세계 초연 레코딩이 나오는 등, 그의 음악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역사적 평가와 유산
생전의 명성과 사후의 평가
살리에리는 생전에 당대 최고의 궁정 음악가로서 누구보다 많은 부와 명예를 누렸습니다. 빈 음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으며, 하이든 등 당대의 저명한 작곡가들과 동등하게 교류했습니다. 그는 온화하고 대인배적인 성격으로 존경받았으며, 사교술이 뛰어나 적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1804년 은퇴 후 살리에리의 오페라는 점차 무대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18세기 후반부터 음악의 트렌드가 변화하면서 살리에리의 작품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생전에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던 살리에리였지만, 오늘날에는 당시 시대를 풍미했던 여러 빈 고전파 음악가들 중 한 명 정도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와 동시대의 음악가인 모차르트의 그늘에 가려져 있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작곡가의 재발견
살리에리는 시대를 앞서간 작품을 남겼음에도 예술적 가치가 평가절하되고 있는 불행한 작곡가입니다. 모차르트가 독살된 게 아니라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를 '불미스러운 스캔들'에 가둬두고 있습니다. 독살설은 후세 사람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20세기 말 영화 '아마데우스'를 계기로 살리에리는 역설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부정적인 이미지였지만, 사람들이 살리에리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의 실제 음악과 업적을 탐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음악학자들은 살리에리의 오페라를 연구하고 재공연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의 교육자로서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음악 교육에 남긴 불멸의 유산
살리에리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그가 가르친 제자들입니다.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로 이어지는 음악사의 거장들이 모두 살리에리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교육적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이 각자의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살리에리가 제공한 탄탄한 기초 위에서였습니다.
또한 살리에리는 무료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실직한 음악가와 유족들을 위한 상조회를 조직하며, 자선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음악계 전체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 음악 교육자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살리에리는 단순히 기술을 전수하는 교사가 아니라, 후배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그들의 성공을 위해 헌신한 진정한 스승이었습니다.
| 구분 | 살리에리 | 모차르트 |
|---|---|---|
| 출생-사망 | 1750-1825 (75세) | 1756-1791 (35세) |
| 출신 | 이탈리아 레냐고 |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
| 주요 직위 | 빈 궁정악장 36년 (1788-1824) | 빈 궁정 작곡가 |
| 오페라 작품 수 | 43편 | 22편 |
| 대표 오페라 | 타라르, 다나이드 |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마술피리 |
| 교육 활동 |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 등 지도 | 제한적 |
| 생전 지위 | 오스트리아 최고 직위 | 재능은 인정받았으나 경제적 어려움 |
| 사후 평가 | 모차르트 그늘에 가려짐 | 역사상 최고의 천재 작곡가 |
| 성격 | 온화, 대인배, 사교적 | 제멋대로, 트러블 메이커 |
| 관계 | 동료이자 협력자 (공동 작곡) | 동료이자 협력자 (공동 작곡) |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영화 속 이미지와 달리 당대 최고의 궁정 음악가이자 위대한 교육자였습니다. 그는 36년간 빈의 궁정악장을 역임하며 43편의 오페라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남겼고, 베토벤과 슈베르트 등 음악 역사를 빛낸 거장들을 길러냈습니다. 모차르트와는 적대 관계가 아닌 동료이자 협력자였으며, 독살설은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합니다. '살리에리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생겨났지만, 실제 살리에리는 열등감에 시달린 2인자가 아니라 당당한 1인자였습니다. 그의 온화한 성품과 자선적 교육 활동, 그리고 음악사에 남긴 유산은 오늘날 재평가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를 진정한 음악의 거장으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