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미하일 바쿠닌 : 아나키즘의 아버지와 혁명적 사상가

by 지식한입드림 2025. 4. 8.

미하일 바쿠닌(1814-1876)은 19세기 러시아 출신의 혁명가이자 아나키즘의 주요 이론가로서, 국가와 권력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마르크스와의 첨예한 이념적 대립을 통해 혁명의 본질과 방법론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시했으며, 그의 사상은 후대 아나키즘 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파괴의 욕구는 곧 창조의 욕구다"라는 그의 명언은 기존 체제의 해체를 통한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그의 혁명적 비전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모두 한계에 부딪힌 시점에서, 바쿠닌의 사상은 '오래된 미래'로서 다시 조명받고 있습니다.

생애와 활동: 귀족에서 혁명가로

초기 생애와 교육

미하일 바쿠닌은 1814년 러시아 토리치노(프레무히노)에서 1,200여 명의 농노를 소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포병 학교를 졸업하고 군 장교로 복무했으나, 군사적 규율과 권위에 대한 반감을 느끼며 1835년에 제대했습니다. 제대 후 바쿠닌은 철학과 사상에 대한 탐구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고, 특히 헤겔과 독일 관념론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혁명 활동과 유럽에서의 망명 생활

1840년대와 1850년대에 바쿠닌은 유럽 전역의 혁명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1842년 '독일에서의 반동'이라는 글에서 "파괴의 열정은, 또한 창조의 열정이다"라는 문장으로 혁명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냈습니다. 1844년에는 브뤼셀을 거쳐 파리에서 카를 마르크스와 교류했으며,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등 여러 지식인들과도 접촉했습니다.

 

바쿠닌은 1848년 유럽 혁명, 프랑스 2월혁명(1847), 프라하 봉기(1848), 드레스덴 봉기(1849) 등 유럽 각지의 혁명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849년 드레스덴 봉기에는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참여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체포와 투옥, 그리고 재기

바쿠닌의 혁명 활동은 그를 여러 차례 체포하게 만들었고, 그는 작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에서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특히 러시아로 송환된 후에는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강한 의지와 결단력은 그를 탈출하게 만들었고, 1861년 그는 일본과 미국을 거쳐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습니다.

 

유럽으로 돌아온 바쿠닌은 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에 참여하여 활동했으나, 마르크스와의 이념적 대립으로 1872년 축출되었습니다. 말년에는 이탈리아로 가서 활동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1876년 스위스 베른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바쿠닌의 사상과 이론

국가와 권력에 대한 비판

바쿠닌의 무정부주의 사상의 핵심은 국가와 권력에 대한 철저한 비판입니다. 그는 국가를 억압적인 기구로 간주하며 개인의 자유를 억제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국가는 사람을 억제하는 기계"라고 말하며, 국가의 모든 형태를 부정했습니다. 바쿠닌은 "어떤 특정 형태의 정부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 정부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바쿠닌에게 국가는 "압제의 인위적 도구"인 반면, 사회는 "인간을 서로 연결하는 본능적, 자연적 유대관계의 확장"이었습니다. 그는 국가가 "극히 중요하며 자연적인 사회의 결속체를 분산시킴으로써 팽창을 유지하는 소외된 사회세력"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개념

바쿠닌은 자유를 단순한 개인적 권리의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적 연대와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진정한 자유는 모든 인간이 평등한 조건에서 자유를 누릴 때만 존재한다"라고 강조하며, 개인의 자유는 사회적 연대와 집단적 자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유명한 말처럼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려야 나 또한 자유롭다"고 주장했으며, "자유는 독자성이 아니라 상호교류의 산물이다. 자유는 개별성이 아니라 연결의 산물이다"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 없는 자유는 기득권이요 부정의다. 자유 없는 사회주의는 노예제요 야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집산주의와 연합주의

바쿠닌은 자유를 위한 사회혁명 사상의 현실적 실현가능한 모델로 집산주의(collectivism)를 제안했습니다. 그의 집산주의의 핵심은 '국가와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의 폐지'였습니다. 그는 개인(특히 노동자)의 국가에 대한 반역과 마르크스와 달리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 개인의 연대를 통한 혁명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바쿠닌은 국가를 대체하는 '자유 정신에 입각한 사회 통합의 원리'로서 '연합주의'(federalism)를 제안했습니다[4]. 이 연합주의의 기초는 '코뮌'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유결사와 자유연합의 원리에 의하여 질서와 조직이 '아래로부터 위로', 그리고 '주변부로부터 중심부로' 형성되어 나아간다"는 원칙 하에, 개인들은 코뮌으로, 코뮌들은 지방으로, 지방들은 민족으로, 민족들은 유럽합중국으로, 그리고 종국적으로 전 세계 합중국으로 결속한다는 것이 바쿠닌의 연합주의 사상이었습니다.

마르크스와의 대립: 이념적 충돌

제1인터내셔널에서의 갈등

온 유럽이 혁명으로 들썩이던 19세기 후반, 바쿠닌은 카를 마르크스의 가장 도드라진 경쟁자였습니다.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을 두고 벌어진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대립은 20세기 세계 전역에서 펼쳐졌던 볼셰비즘과 아나키즘 사이 치열한 대립의 원조이기도 했습니다.

 

바쿠닌은 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와 4년 동안 대립하다 1872년 제명되었습니다. 마르크스는 바쿠닌의 동료 세르게이 네차예프의 편지를 구실로 바쿠닌을 인터내셔널에서 축출했습니다.

이론적 차이점과 접근 방식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국가에 대한 태도와 혁명의 주체에 관한 견해에 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한 국가 권력 장악을 주장한 반면, 바쿠닌은 국가 자체의 폐지를 주장했습니다.

 

바쿠닌이 노동계급 이외 '모든 억압받는 대중계급'을 사회혁명세력으로 인정한 반면, 마르크스는 오직 노동자계급만을 혁명의 주체로 봤습니다. 특히 농민에 관한 태도 차이가 두드러졌는데, 마르크스는 혁명을 수행할 능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에 기반을 두고 농민은 결코 계급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본 반면, 바쿠닌은 러시아 농민의 삶 속에 '공유'를 신성시하는 삶의 태도가 배어 있다고 보고 혁명 세력으로서 농민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에드워드 핼릿 카는 "개인주의는 바쿠닌의 사회적·정치적 체계의 진수이며 마르크스를 반대하는 바쿠닌 사상의 본질"이라고 말했습니다. 마르크스가 정치가·행정가의 눈으로 대중을 바라본 데 반해, 바쿠닌은 선지자이자 공상가로서 대중이 아닌 개인, 제도가 아닌 도덕에 관심을 쏟았다는 것입니다.

바쿠닌의 예언적 통찰

바쿠닌이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 가진 가장 중요한 비판 중 하나는 그것이 독재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이었습니다.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대로 하면 독재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이 예측은 20세기 소련의 역사 속에서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바쿠닌은 "민중이 지팡이로 두들겨 맞을 때에는 그 지팡이를 '민중의 지팡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민중이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국가 사회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영향과 역사적 의의

아나키즘 운동에 미친 영향

미하일 바쿠닌은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과 더불어 '아나키즘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는 현대적 형태의 아나키즘을 정립했으며, 그의 혁명적이고 계급투쟁에 기초한 아나키즘은 1인터내셔널 당시 아나키즘의 주된 형태가 되었습니다.

 

바쿠닌은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근간을 놓았으며, 20세기 아나키즘의 조류를 이루었던 조르주 소렐의 생디칼리즘과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사회주의 아나키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를 통해 무신론·권력 부정을 주장하여, 러시아의 니힐리즘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주요 혁명에서의 사상적 영향

바쿠닌의 사상은 러시아와 스페인 혁명에서 그 힘을 입증했습니다. 그는 스페인·이탈리아·러시아 혁명 등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그의 사상은 국가 권력이 아닌 자율적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혁명적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바쿠닌은 혁명에 대해 "혁명은 광범위한 파괴를 요구한다. 오로지 비옥하고 혁신적인 파괴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이 탄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관점은 권위적 체제에 대한 저항과 자율적 공동체 건설이라는 혁명적 비전을 대표합니다.

후대 사상가들에 대한 영향

바쿠닌의 사상은 그의 사후에도 많은 아나키스트와 혁명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그의 국가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는 후대 아나키즘 사상의 핵심을 형성했습니다.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가 지적했듯, 바쿠닌은 "이론이나 과학과 같은 인위적인 틀에 기대지 않고도, 생명 자체의 원리로부터 모든 지배와 권위를 거부하는 정당성을 창조해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바쿠닌의 이러한 접근은 후대 사상가들에게 자연적 질서와 자발적 협력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현대적 의미와 평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 바쿠닌의 사상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모두 한계에 부딪힌 현대 사회에서, 바쿠닌의 사상은 '오래된 미래'로서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의 국가와 권력에 대한 비판, 자율적 공동체에 대한 비전, 개인의 자유와 연대에 대한 강조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대안적 시각을 제공합니다.

 

하승우 지행네트워크 연구활동가의 평가처럼 "바쿠닌은 '생명의 능동적 자발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은 기계적이고 관료적인 시스템이 아닌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질서에 기반한 사회 조직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현대 사회와 조직에 주는 시사점

바쿠닌의 사상은 현대 경영과 조직 이론에도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그의 아나키즘적 원칙은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아닌 수평적 조직 구조, 즉 팀워크와 자율성을 강조하는 현대의 경영 방식과 유사합니다. 현대 기업들은 변화를 감지하고 그에 맞게 적응하기 위해 자율적이고 유연한 조직 문화를 필요로 하는데, 이는 바쿠닌이 주장한 '자발적인 질서'와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바쿠닌의 사상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과 윤리적 경영이 강조되는 현대 경영과도 연결됩니다. 그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한다고 비판하며, 진정한 자유는 경제적 평등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경영자들이 단순히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바쿠닌 사상에 대한 비판적 평가

바쿠닌의 사상은 그 혁명적 비전에도 불구하고 여러 모순과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평생 권위를 무너뜨리려 달려들기만 했고, 이룬 성과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가 관여한 여러 무장봉기는 모두 실패했으며, 벌인 일들이 제대로 끝맺은 경우도 극히 드물었습니다.

 

에드워드 핼릿 카는 바쿠닌의 삶이 모순으로 가득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는 중앙집권과 제도적 권위를 부정하면서도 음모에 기반한 비밀결사 활동에 매진했고,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비밀결사를 통한 방법론적 한계를 보였습니다. 또한 바쿠닌은 굉장한 카리스마와 열정을 갖췄지만, 늘 누군가를 가르치려 드는 자세에다 거의 한평생 남에게 빚을 지고 살았다는 점에서 인물 자체가 모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바쿠닌이 "역사상 (어떤 권위나 제도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의 정신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평가는 그의 사상과 실천이 가진 역사적 의의를 잘 보여줍니다[1]. 그의 모순적인 삶과 사상은 오히려 자유와 권위, 개인과 집단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며,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을 제기합니다.

결론

미하일 바쿠닌은 19세기의 혁명적 아나키스트로서, 국가와 권력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개인의 자유 및 자발적 연대에 기초한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마르크스와의 이념적 대립을 통해 혁명의 본질과 방법론에 대한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했으며, 그의 예언적 통찰은 20세기 역사 속에서 상당 부분 입증되었습니다.

 

바쿠닌의 사상은 후대 아나키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모두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대안적 시각을 제공합니다. 그의 모순적인 삶과 사상은 개인과 집단, 자유와 평등, 파괴와 창조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요구하며, 이는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인간은 불가능한 것을 위해 분투함으로써 가능한 것을 성취해냈다"라는 바쿠닌의 말처럼, 그의 급진적인 비전과 불굴의 투쟁 정신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영감을 주며, 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