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해방 정국의 격랑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3·1운동 당시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해 단기간에 전국 145개 지방위원회를 조직하는 행정력을 발휘했다. 1946년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분단을 막으려 했으나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 청년에게 암살당하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남겼다.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될 때까지 61년간 공식적 평가가 보류된 그의 생애는 한국 현대사 이해의 핵심 코드다.
초기 생애와 독립운동의 기반 형성
양반 가문의 반전(反轉) 교육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소론 계열 양반 집안의 9대 종손으로 태어난 여운형은 조부 여규신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았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중국 정벌론"을 펼치다 유배당한 조부는 역사서 강독을 통해 반청(反淸) 의식을 심어주었으며, 동학에 입교해 "보국안민(輔國安民)" 사상을 전수했다. 이는 훗날 그가 기독교·사회주의·민족주의를 아우르는 종합적 세계관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1907년 21세의 청년 여운형은 양평 광동학교를 설립하며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의 교육 철학은 "서양 문물 수용 = 부국강병"이라는 단순 등식에서 벗어나, 노비문서 소각(1908)과 신주단지 파괴 등 봉건적 관습 타파를 선도하며 "인격 혁명"을 강조했다. 이는 1914년 난징 금릉대학 유학 시절 서구 근대 사상과 결합되며 독립운동의 이론적 기반으로 발전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의 좌절
1919년 3·1운동 직후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한 그는 상해 임시정부 외무차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황실 중심 체제를 주장하는 이승만 세력과의 갈등으로 1920년 임시정부를 떠나 독자적 외교노선을 걸었다.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한국 대표로 참석하려 했으나 미국 비자 발급 거부로 좌절되며, 이 시기부터 "실천적 중도노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암투(暗鬪)와 건국 준비
언론과 체육을 통한 저항
1929년 조선체육회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맞서 전조선야구대회를 주최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당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주도하며 항일 정신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 사건으로 투옥되며 고문을 당했으나, 옥중에서도 "해방 후 건국 청사진"을 구상하는 등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선건국동맹의 비밀 결성
1944년 8월 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한 그는 "무장봉기 대신 행정 인력 양성"이라는 독특한 전략을 채택했다. 전국 38개 도시에 2만5천명의 조직원을 확보하며, 해방 직후 3일 만에 치안대 3만명을 동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8·15 직후 조선총독부가 그에게 행정권 이양을 요청하게 만든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해방 정국의 풍운아
21일간의 행정 쾌속질주
1945년 8월 15일 오전 9시,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은 여운형을 총독부로 초청해 "치안 유지 협력"을 요청했다. 그는 ① 정치범 전원 석방 ② 3개월분 식량 공급 ③ 행정 간섭 금지 등 5개 조건을 내걸고 협상을 타결, 당일 오후 1시 휘문중학교에서 건국준비위원회를 공식 발족시켰다. 8월 21일까지 전국 13도에 위원회를 설치하며 일제 행정체계를 완전히 접수한 것은 그의 조직력이 빛난 순간이었다.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시도
9월 6일 경기여중 강당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그는 "미·소군이 철군하면 인공 정부가 즉시 권한을 행사할 것"이라 선언하며 과도정부 수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9월 9일 인천에 상륙하자 "군정과의 협력 불가"를 선언하며 좌초되었고, 이는 훗날 남북 분단의 서막으로 작용했다.
좌우합작운동과 비극적 최후
12차례의 암살 시도
1945년 8월 18일 첫 암살 시도부터 1947년 7월 19일 최후까지 총 12차례에 걸친 테러를 당했다. 1947년 3월에는 서울 계동 자택이 폭파되었으며, 5월 혜화동에서의 총격으로 오른팔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미군정 경찰의 방조 의혹은 당시 치안책임자였던 장택상의 "테러는 좌익 자작극" 발언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암살 사건의 의문점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14분, 혜화동 로터리에서 저격수를 기다리듯 정차한 리무진 안에서 그는 .32구경 권총탄 3발을 맞고 사망했다. 현장을 지켜본 미국 육군 소위 프랭크 레이의 증언에 따르면, 암살 직전 의도적인 교통사고로 차량이 멈추었으며 경찰이 범인 추격을 방해했다. 1974년 암살 가담자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백의사·혁신탐정단 등 극우단체가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미군정 정보장교 노덕술의 개입이 있었다.
역사적 재평가와 유산
61년 만의 공식 복권
2005년 3·1절에 독립유공자로 서훈되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격상되었다. 2019년 국가보훈처는 그의 공적을 기려 생가 터에 몽양기념관을 건립했으며, 2024년 인천시에서 '미메시스' 프로젝트를 통해 예술적 업적을 재조명 중이다.
미완의 통일 지향
1946년 좌우합작 7원칙에서 제시한 "남북 총선거 실시" 안은 1948년 단정 수립으로 좌절되었으나, 2000년 6·15 공동선언과 2018년 판문점 선언에서 그 정신이 재현되었다. 2024년 현재 DMZ 내 평화의 길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분단 극복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결론: 두 개의 초상화 사이에서
여운형은 식민지 시대 "변절 없는 협상가"로서, 해방기 "실용적 이상주의자"로서 한국 현대사의 모든 모순을 체화한 인물이다. 그의 암살 배후에 대한 논란은 단순히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닌, 분단 체제 탄생의 본질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2024년 남북한이 유엔 동시 가입 33주년을 맞은 오늘, 몽양의 좌우합작 정신은 통일을 향한 유일한 실마리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