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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S. 위트컴 장군 : 한국을 사랑한 미국 장군

by 지식한입드림 2025. 3. 8.

리차드 S. 위트컴(Richard S. Whitcomb, 1894년 12월 27일 ~ 1982년 7월 12일) 장군은 미국 캔자스주에서 태어나 미 육군에서 복무한 인물로,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등 굵직한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특히 한국전쟁과 그 이후 한국 사회의 재건에 기여한 공로로 인해 한국인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인도주의적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역사에서 빛나는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군 경력과 전쟁 참전

위트컴 장군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며 군수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영국 브리스틀 항구의 사령관으로서 군수 지원을 담당했으며,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군수 전략가로 평가받았습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에 위치한 미 제2군수사령부의 사령관으로 부임하며 대한민국과의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됩니다.

한국전쟁과 인도주의적 활동

부산 대화재와 긴급 구호

1953년, 부산역 인근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여 3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위트컴 장군은 즉각적으로 군수 물자를 개방하여 이재민들에게 천막, 식량, 의복 등을 제공하며 긴급 구호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는 미국 군 규정을 위반한 행동으로, 이후 미 의회 청문회에 소환되었지만, 그는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승리는 그 나라 국민을 돕는 데 있다”고 강변하며 의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이 일화는 그가 단순한 군인이 아닌, 인간애를 실천한 지도자였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전쟁고아와 의료 지원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가 급증하던 시기, 위트컴 장군은 이들을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는 미군 장병들에게 월급의 1%를 기부하도록 독려하였고, 직접 한복을 입고 거리에서 모금 활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부산에 메리놀병원 등 여러 의료 시설이 설립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헌신 덕분에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치료를 받고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교육 지원과 부산대학교 설립 기여

위트컴 장군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사회의 교육 재건에도 기여했습니다. 특히 부산대학교 장전캠퍼스 설립을 위해 165.3헥타르에 달하는 부지를 기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부산대학교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교육 기관 중 하나로 자리 잡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전역 후 한국과의 인연

1955년 전역한 후에도 위트컴 장군은 한국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한국의 전쟁고아 및 참전용사 가족들을 돕는 활동을 이어갔으며, 특히 한국전쟁 중 실종된 미군 유해 발굴에 힘썼습니다. 그는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여기며 평생을 헌신하였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최고 등급의 민간 공로 훈장인 무궁화 훈장을 받았습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 안장

1982년 7월 12일, 위트컴 장군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평소 ‘내가 마지막을 맞이하면 한국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으며, 이에 따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외국인이지만 한국의 땅에서 영면을 택한 그의 선택은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위트컴 장군의 유산과 평가

위트컴 장군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전쟁 속에서도 인도주의를 실천한 지도자로 기억됩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수많은 한국인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며, 그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부산에는 그의 공로를 기리는 조형물이 세워졌으며, 여러 다큐멘터리와 기사에서도 그의 삶과 업적이 조명되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을 한국인보다 더 사랑한 미국 장군으로, 전쟁과 재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이웃을 돕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보여준 인물입니다. 그의 인도주의적 가치와 헌신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