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르친스크 조약(러시아어: Нерчинский договор, 만주어: ᠨᡳᠪᠴᡠ ᡳ ᠪᠣᠵᡳ ᠪᡳᡨᡥᡝ, 중국어: 尼布楚條約)은 1689년 8월 27일 러시아 자바이칼 변경주의 네르친스크에서 청나라와 러시아 차르국 사이에 체결된 역사적인 국경 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동아시아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두 대제국이 최초로 평등한 입장에서 맺은 조약이라는 점에서 국제관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조약 체결의 배경
17세기 중엽, 러시아는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는 모피 무역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베리아는 모피가 풍부한 지역이었습니다. 이반 4세가 타타르를 축출한 이후 시베리아는 무주공산이 되었고, 러시아 정부는 카자크를 고용하여 동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1640년대부터 러시아인들이 아무르강(흑룡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청나라의 영토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1651년 본국에서 병력을 증원하여 아무르강 유역의 다우르족을 공격했고, 알바진(Albazin)과 네르친스크에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이들은 이 지역에서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며 청나라와 긴장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청나라는 중국 대륙을 점령한 직후였고, 1673년부터 1681년까지 삼번의 난으로 인해 내부 문제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한동안 러시아의 남진을 제대로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강희제가 삼번의 난을 진압한 후 1685년 청나라는 본격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청나라와 러시아의 군사 충돌
1685년 5월, 청나라는 1만 5천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알바진 요새를 포위 공격했습니다. 청군은 병력 3,000명에 포 100-150문, 장총 40-50정, 머스켓 총 100정으로 무장했고, 러시아의 코사크 부대는 450~500명 정도에 머스켓 총 300정으로 방어했습니다. 청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첫날 목책이 부서지고 러시아군 100여 명이 전사하자, 알바진의 러시아 지휘관 알렉세이 톨부진은 항복했습니다.
강희제는 승자의 아량을 베풀어 톨부진과 그의 부하들, 가족들을 모두 풀어주었으며, 청나라에 잔류하기를 원하는 코사크 45~50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네르친스크로 돌아간 러시아군은 지원군을 받아 1686년 다시 알바진을 탈환했고, 청나라는 같은 해 2월 재차 알바진을 공격했습니다. 10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러시아군의 병력이 소진되었고, 양측은 휴전에 합의했습니다.
이 시기 청나라와 러시아 모두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청나라는 몽골에서 내분이 발생했고, 러시아는 남부 크림 반도에서 오스트리아, 폴란드, 베네치아와 연합하여 투르크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국은 먼 변경 지역에서 전투를 지속하기보다는 외교적 타협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조선의 나선정벌 참여
러시아의 침략에 대응하던 청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선정벌입니다. '나선'은 러시아를 한자로 음역한 명칭입니다. 청나라는 이들을 만주 너머 시베리아에서 남하한 정체 모를 유목 집단으로 파악했고, 누가 그 먼 유럽에서 시베리아를 건너 만주까지 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1654년 효종은 조총군 100명과 초관 50여 명을 파견했습니다. 조선군은 영고탑에서 청군 3,000여 명과 합세하여 혼동강에서 러시아군과 교전하여 7일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후 1658년에도 제2차 나선정벌이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나선정벌이 끝난 이후에야 나선이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러시아 역시 자신들의 원정대가 청나라와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네르친스크 조약 협상 과정
1688년, 러시아와 청나라는 강화 교섭을 위해 네르친스크로 향하려 했으나 몽골 기병에 의해 가로막혔습니다. 1689년, 협상이 재개되었고 드디어 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청나라 측 전권대사는 허서리 씨족의 송고투(索額圖)였습니다. 송고투는 강희제의 측근으로 오보이를 제거하는 데 공헌한 인물이었으며, 이후 네르친스크 조약을 성공적으로 체결하여 청 조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었습니다. 러시아 측 전권대사는 표도르 알렉세예비치 골로빈이었습니다.
협상은 매우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러시아는 회담장에 1만 5천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청나라도 회담장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고 무력 시위를 벌였습니다. 회담 초기에는 양측의 군사적 충돌로 인해 청나라가 레나 강을 국경으로 정할 것을 요구하는 등 국경선에 대한 심각한 신경전이 벌어졌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조약의 통역을 맡은 사람들이 예수회 선교사였다는 것입니다. 포르투갈 출신의 토마스 페레이라(徐日昇)와 프랑스 출신의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張誠)이 라틴어 통역을 담당했습니다. 이들은 강희제의 신임을 받던 예수회 선교사들로, 천문학과 수학을 황제에게 가르쳤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조약문은 라틴어를 원본으로 작성되었으며, 만주어와 러시아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중국어 번역본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만주족 황실이 한족에게 러시아와 대등한 조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조약의 주요 내용
네르친스크 조약은 6개 조항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아무르강(흑룡강)의 지류인 아르군강, 케르비치강(고르비차강)과 외싱안령산맥(스타노보이산맥)을 양국 간의 국경으로 정했습니다. 외싱안령산맥에서 발원하는 고르비차강이 대흥안령(스타노보이산맥)이 바다에 이르는 선을 경계로 남쪽은 청나라가, 북쪽은 러시아가 차지하기로 했습니다.
둘째, 알바진 요새는 파괴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서로 빼앗고 빼앗기던 알바진 요새를 폭파함으로써 분쟁의 소지를 제거했습니다. 청나라는 알바진 땅을 주민이 살지 않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서약을 받았는데, 이는 청나라가 아무르강 좌안에 대한 러시아의 주권을 암묵적으로 제한한 것이었습니다.
셋째, 우디강 남쪽과 대흥안령 북쪽 사이의 땅은 중립지대로 삼고, 나중에 다시 협의하여 조정하기로 했습니다. 오제하(우디강) 이남, 흥안령 이북의 중간 지역에 있는 모든 토지와 강은 잠시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넷째, 월경자(국경을 넘는 자)의 인도와 처벌 문제를 규정했습니다. 정해진 경계를 사사로이 넘는 자가 있다면 즉시 해당 국가의 법에 따라 처벌하며, 앞으로 경계를 넘는 사람은 통행 허가증을 소지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다섯째, 양국 민간인 사이의 자유 통상을 허용했습니다. 허가증을 가지고 정당한 활동을 하는 외국인은 추방당하지 않으며, 개항한 항구에서 상인들이 무역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여섯째, 과거의 모든 갈등을 잊고 앞으로 영구히 평화롭게 지내며, 위반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조약의 결과와 영향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청나라는 아무르강(흑룡강) 북안과 스타노보이산맥 남쪽 사이의 땅에 대한 영토권을 확립했습니다. 청나라는 약 6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를 확보했고,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했습니다. 한편 러시아는 청나라와의 무역을 보장받게 되었고, 트랜스바이칼리아(바이칼 호수 동쪽)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또한 러시아 무역 대상이 베이징에 올 수 있는 통행권을 확보했습니다.
이 조약은 중국 역사상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주변국들을 야만족으로 간주하고 조공-책봉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그러나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국이 서양 국가와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최초의 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조약에 러시아어, 만주어, 라틴어가 사용되었지만 중국어가 사용되지 않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영국의 역사학자들로부터 중국이 서양 국가를 동등한 지위의 국가로 인정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받았습니다. 러시아는 다른 유럽 국가들이 달성하지 못한 성과, 즉 청나라로부터 국가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후속 조약들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두 나라는 국경을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 1727년 캬흐타 조약을 추가로 체결했습니다. 캬흐타 조약은 11개 조항으로 구성되었으며, 몽골 지역의 국경을 정하고, 러시아 대상이 200명의 인원으로 3년에 한 번씩 베이징에 올 수 있게 했으며, 캬흐타와 아르군강변에 교역장을 설치했습니다. 또한 러시아가 베이징에 교회를 설립하고 선교사와 어학 연구생을 둘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네르친스크 조약과 캬흐타 조약으로 확정된 국경선은 약 170년간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 청나라의 국력이 쇠퇴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제2차 아편전쟁(1856~1860) 중 청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의 침공을 받자, 러시아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중재를 명목으로 청나라에 영토를 요구했습니다.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청나라는 아무르강 이북 지역을 러시아에 할양했습니다. 아무르강 좌안은 러시아 영토가 되었고, 우수리강 동쪽 연해주는 양국이 공동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이로써 청나라는 약 60만 평방킬로미터(한반도 면적의 약 3배)에 달하는 땅을 잃었습니다.
2년 후인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청나라는 우수리강 동쪽 연해주마저 러시아에 영원히 할양했습니다. 이로써 청나라는 동해로 나가는 길이 막혔고,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향하는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선은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에 의해 그어진 것입니다.
청나라와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을 서로 다르게 평가했습니다. 청나라 측에서는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고 영토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승리로 간주했지만, 동시에 서양 오랑캐와 평등 조약을 맺었다는 점에서 불만을 가졌습니다. 러시아 측에서는 아무르강 유역에서 후퇴해야 했다는 점에서 불평등 조약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양측의 불만은 19세기에 러시아가 네르친스크 조약을 불평등 조약으로 규정하고 파기를 요구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조약의 역사적 의의
네르친스크 조약은 여러 면에서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이 조약은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의 최초의 공식 조약이었습니다. 양국의 국경을 명확히 하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둘째, 중국 역사상 최초로 서양 국가와 평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조약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중화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적 국제법의 원칙에 따라 조약을 체결한 것은 중국 외교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셋째, 이 조약은 라틴어로 작성된 최초의 중국 조약이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통역과 조약 작성에 참여함으로써 서양의 외교 관행이 동아시아에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넷째, 네르친스크 조약은 약 170년간 청-러시아 관계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 조약에 기반하여 양국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고, 무역과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다섯째, 이 조약은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의 지정학적 판도를 결정했습니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확정된 국경선은 이후 동북아시아의 역사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섯째, 조약 체결 과정에서 조선이 나선정벌로 참여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는 17세기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서 조선이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일곱째, 네르친스크 조약은 이후 동아시아에서 근대적 조약 체제가 형성되는 선례가 되었습니다. 비록 중국이 19세기에 서양 열강들과 맺은 조약들은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네르친스크 조약은 평등한 조약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17세기 후반 동아시아와 시베리아 지역의 국제 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강희제의 현명한 외교 정책과 송고투의 뛰어난 협상 능력, 그리고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재 역할이 결합하여 이러한 성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조약은 동서양 문명이 만나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어낸 역사적 사례로서, 오늘날에도 국제 관계사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