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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촌 : '범서방파'의 보스, 1970~1980년대 한국 조직폭력배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

by 지식한입드림 2025. 6. 11.

김태촌(金泰村, 1948-2013)은 1970~1980년대 한국 조직폭력배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범서방파'라는 대규모 폭력조직을 이끌며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였다. 그의 삶은 극빈한 유년시절에서 시작하여 전국구 조폭 두목으로의 성장, 그리고 말년의 종교적 회심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격동기를 관통하는 파란만장한 궤적을 그렸다. 특히 가수 이영숙과의 옥중결혼으로도 큰 사회적 관심을 받았으며, 그의 조직은 조양은의 '양은이파', 이동재의 'OB파'와 함께 전국 3대 폭력조직으로 꼽히며 한때 국내 주먹계를 주름잡았다.

성장 배경과 초기 생애

가정환경과 유년시절

김태촌은 1948년 10월 10일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당시로서는 비교적 교육받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미국 선교사로부터 신학을 배운 후 목회 활동을 하다가 경찰에 투신해 파출소에서 근무했으며, 어머니는 일제시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중학교를 졸업한 인물이었다. 6·25 전쟁 이전까지는 다복한 가정이었으나, 여순 반란 사건과 빨치산 소탕 작전 과정에서 가족이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는 빨치산 즉결 총살 때 총구를 다른 곳으로 돌려 권총을 쏘았다는 이유로 국법에 위배되어 순경 옷을 벗게 되었다. 이후 가족은 광주로 이사해 서방면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훗날 김태촌이 이끈 '서방파'는 어릴 적 고향 이름을 딴 것이었다. 아버지는 갖가지 사업을 했지만 모두 망했고,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자 노상에서 품팔이를 해야 했다. 어머니마저 과일·채소 장사를 해야 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으며, 식구들은 하루에 밥 한끼 먹지 못하고 강냉이죽으로 연명했다.

비행 청소년기와 범죄의 시작

김태촌이 주먹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 계기는 어린 시절 행상을 하던 어머니가 깡패들에게 행패를 당한 사건이었다. 당시 교회에 다니던 그의 어머니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면서 깡패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빌었다. 그 모습을 보고 김태촌은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로 달려가 유리창을 깨뜨렸는데, 이는 '아무런 힘도 없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 섞인 분풀이였다.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지만 가난과 배고픔이 싫어 어린 나이에 가출했으며, 같은 또래의 불량 소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나쁜 짓만 골라서 하고 다녔다. 신문팔이, 우산장수, 구두닦기, 아이스케키 장사 등 밑바닥 인생을 시작했고, 불량 서클을 만들게 되어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다. 결국 열일곱 살에 광주소년원에 들어갔으며, 스무 살까지 소년원을 세 번씩이나 들락거렸다. 어린 나이에 비해 수형 기간이 길어서 병역은 면제되었다.

조직폭력배로서의 성장과 활동

서울 진출과 세력 확장

김태촌은 1973년 광주교도소에서 8·15 가석방으로 출소한 송태준 선배를 따라 상경했다. 호남파 원조인 송태준은 '송깡'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4·19혁명 이후 가장 체계적인 조직을 이끌던 2세대 호남파 총두목이었다. 1975년 전남 광주 폭력조직인 범서방파의 행동대장을 시작으로 폭력세계에 발을 들인 김태촌은 정치깡패로도 활약했다.

 

1976년은 김태촌의 주먹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해였다. 이 해에 양은이파와의 3년 전쟁에 불을 지른 오종철 난자 사건과 1970년대 정치폭력의 상징인 신민당 전당대회 난입사건이 모두 일어났다. 김태촌은 이철승 당시 국회의원의 명령으로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을 일으켰는데, 이 과정에서 김영삼 당시 신민당 신임 대표를 습격했으나 김영삼은 창문으로 뛰어내려 겨우 도주했다.

 

1977년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기는 과정에서 여러 군소 조직들을 제압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후 정·재계는 물론 연예계까지 인맥을 넓히며 활동하다가 조직원들을 시켜 뉴송도 호텔 나이트클럽 사장을 흉기로 난자해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유명해졌다.

3대 폭력조직과 조직 간 갈등

김태촌이 이끄는 '범서방파'는 조양은의 '양은이파', 이동재의 'OB파'와 함께 한때 전국 3대 폭력조직으로 꼽혔다. 1970년대 서울의 조폭세계는 토착세력 '신상사파'가 장악했으나, 1975년 1월 2일 범호남파 계열 '오종철파' 행동대장 조양은이 조직원 3명과 함께 신상사파 신년회가 열린 사보이호텔 커피숍을 습격한 사건으로 판도가 바뀌었다.

 

1976년 3월 김태촌은 무교동 엠파이어호텔 후문 주차장에서 조양은의 보스 오종철을 기습해 부상을 입혔다. '양은이파' 조양은과 '서방파'로 독자세력을 구축한 김태촌은 이때부터 숙명의 라이벌이 되었다. 범서방파를 비롯한 초창기 폭력조직은 흔히 '나와바리'로 불리는 사업 영역을 기반으로 활동했으며, 유흥업소 등을 갈취하고 조직 간 이권 다툼이 생기면 대규모 난투극이나 칼부림을 벌여 상대 조직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주요 사건과 법적 처벌

뉴송도호텔 살인교사 사건

1987년 김태촌은 인천 뉴송도호텔 나이트클럽 사장 황씨 살인교사 혐의로 징역 5년, 보호감호 7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검찰이 김태촌에게 1·2심 재판 모두 사형을 구형했을 정도로 김태촌과 조직원들의 범행은 잔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촌은 복역 중 1989년 폐암 진단을 받고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범서방파 결성과 추가 처벌

교도소에서 신앙에 몰두했다는 김태촌은 1989년 '신우회'를 결성하고 그해 6월 16일 경기 파주에서 '축복기도대성회'라는 종교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검찰은 300여명이 참석한 이 행사를 '범서방파' 결성식으로 판단했다. 1990년 범죄단체 '신우회' 구성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며, 1997년에는 이전의 공문서 위조교사 등의 혐의가 발각돼 징역 1년 6월의 형이 추가되어 형량이 모두 16년 6월 및 보호감호 7년으로 늘어났다.

 

김태촌은 총 16년의 형기를 끝마치고 2005년 출소했으나, 복역기간 중의 뇌물공여 및 영화배우 권상우 협박 등의 혐의로 2006년 11월 또다시 구속되었다. 2007년에는 배우 권상우에게 일본 팬미팅 행사를 강요하는 협박성 전화를 건 사실이 드러나 추가기소되었으나 이듬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종교적 회심과 개인적 삶

기독교 귀의와 교회 활동

김태촌은 본래 무종교자였지만 나중에 개신교(장로회)에 귀의 입문하였다. 수감 중 신앙에 몰두한 김태촌은 출소 후 인천의 한 교회에서 집사로 활동하면서 소년원, 경찰서 등을 찾거나 TV 등에서 설교와 신앙 간증을 적극적으로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형기를 마친 후에는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교화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영숙과의 결혼

김태촌의 개인적 삶에서 가장 주목받은 부분은 1960~1970년대 인기가수 이영숙과의 만남과 결혼이었다. 이영숙은 1968년 '아카시아의 이별'로 데뷔해 '그림자'(1969), '가을이 오기 전에'(1969), '꽃목걸이'(1971), '왜 왔소'(1971) 등 많은 히트곡을 남긴 인기가수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교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영숙은 교회에 다니면서 목사의 소개로 김태촌을 만나게 되었으며, 수감 중인 김태촌을 교화해 달라는 목사의 부탁을 받았다. 이영숙이 열심히 면회를 하며 수발을 하다 1998년 옥중결혼까지 하게 되어 큰 화제가 되었다. 당시 이영숙은 "3년 동안 서신 왕래를 했다지만 30년 살아온 사람보다 더 서로를 많이 안다. 거짓없이 서신을 주고 받았다"며 서로의 진실된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만년과 사망

건강 악화와 최후

김태촌은 갑상샘 치료를 위해 2011년 12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며, 2012년 3월부터는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서울대학교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김태촌은 2011년 12월부터 갑상샘 질환 치료를 위해 입원했으며, 호흡곤란으로 3월부터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있었다.

 

2013년 1월 5일 오전 0시 42분경 김태촌은 심부전으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64세였다. 사인은 심부전으로 알려졌으며, 약 1년간의 투병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약 300명이 참석했으며, 경찰은 150여 명의 전경을 동원해 병원 주변을 경계했다.

부인 이영숙의 사망

김태촌 사망 3년 후인 2016년 11월 17일 밤 11시 45분, 부인 이영숙도 자궁경부암 재발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세였다. 이영숙의 남동생은 "누나가 16년 전 암 투병을 했는데 2년 전 재발해 올해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며 "매형(김태촌)이 2013년 세상을 떠난 뒤 3년 만에 누나도 남편을 따라가게 됐다"고 말했다.

범서방파의 몰락과 역사적 의미

조직의 와해

김태촌 사망 이후 범서방파는 급속히 와해되었다. 2016년 10월에는 범서방파 부두목급인 최모씨가 구속되면서 범서방파 간부급이 모조리 철창신세가 되어 조직이 구심점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범서방파는 2000년대 후반까지 조직 간 세력 과시와 난투극이라는 '고전적' 조직 운영 방식을 버리지 못하다 결국 수뇌부가 와해되는 운명을 맞았다.

 

2009년 11월 부산 '칠성파'와 벌인 '강남 흉기 대치극 사건'이 결정적 계기였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범서방파 150명과 칠성파 80명이 회칼과 각목 등을 들고 살벌하게 대치했으며, 이 사건으로 범서방파는 수사 당국의 집중 단속 대상이 되었다.

한국 조직폭력사에서의 위치

김태촌과 범서방파는 1970~1980년대 한국 조직폭력 세계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조직폭력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에 한국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며, 범죄 조직들이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정치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90년 공식적인 단속으로 수백 명의 조직원과 보스들이 수감되었지만, 김태촌의 사례는 이러한 조직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결론

김태촌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관통하는 상징적 인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극빈한 유년시절에서 시작하여 전국구 조폭 두목으로 성장한 그의 궤적은 1970~1980년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개인의 선택이 어떻게 사회적 파장을 만들어내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말년의 종교적 회심과 가수 이영숙과의 사랑 이야기는 그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한편, 변화와 구원의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범서방파의 몰락과 함께 전통적 의미의 조직폭력배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김태촌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 배경과 개인적 선택,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역사적 궤적을 읽을 수 있다. 그의 삶은 단순한 범죄자의 이야기를 넘어 한국 사회가 겪어온 변화와 그 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사회 현상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