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포항의 '밤의 황태자'에서 자선사업가로, 트로트 가수로, 그리고 복싱 체육관 운영자로 변모한 김두조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배우 이휘향과의 19살 차이 결혼으로도 화제가 되었던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한동대학교에 기증하고, 법무부 장관 표창을 세 차례나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2005년 폐암 진단을 받고 2008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김두조의 삶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간 한 인간의 진정한 변화와 성장을 보여줍니다.
포항의 건달에서 '밤의 황태자'로
김두조는 1944년경 태어나 1960년대 경북 포항에서 '이름 있는 건달'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지역 언론인 경북매일신문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밤의 황태자'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아시아위클리뉴스에서는 그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과거를 지닌 인물'로 소개했습니다.
그는 복싱을 좋아했으며, 대구교도소에서 복역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교도소에서 그는 악대 반장을 맡아 여러 악기를 다루는 탁월한 솜씨를 보였는데, 특히 드럼 실력은 프로급이었다고 합니다. 출소 후에는 포항 시내 음악다방과 협업하여 실시간으로 가요를 유선으로 제공하고 월회비를 받는 사업을 했으며, 포항 연예인협회장 직함도 갖고 있었습니다.
이휘향과의 만남과 새로운 삶의 시작
김두조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 것은 배우 이휘향과의 만남이었습니다. 1981년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이휘향은 서구적인 미모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주목받던 신인 배우였습니다. 두 사람은 MBC 드라마 '수사반장'의 '밀수' 에피소드를 포항 바닷가에서 촬영하던 중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포항 경찰서 수사과 형사반장 김모 경사가 이휘향에게 김두조를 "포항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이것이 두 사람의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김두조는 이휘향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했고, 처음에는 이휘향의 부모가 강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김두조는 이휘향의 아버지를 포항으로 초대해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1982년, 42세의 김두조와 23세의 이휘향은 결혼했습니다. 당시 19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의 결혼은 많은 화제를 모았고, 심지어 김두조가 강압적으로 결혼을 강요했다는 소문까지 돌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결혼 후 김두조는 건달 세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사업가와 가수로서의 성공
결혼 후 김두조는 포항에서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며 후배 양성에 전념했습니다. 그의 체육관에서는 세계챔피언 백종권 선수가 배출되었으며, 정통킥복싱, 경호체육(종합무술) 분야에도 깊이 관여해 세계무술경호 경북본부 회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 방향에 임곡휴게소를 경영하고, 고가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졌습니다. 가수로도 데뷔해 '아주까리 부두', '영일만 디스코' 등의 곡이 담긴 다섯 장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사나이 연가'라는 자작곡을 통해 자신의 삶을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김두조와 이휘향 부부는 서울과 포항을 오가는 주말부부로 지내야 했는데, 김두조는 아내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을 담은 노래 '주말부부'를 발표하며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자선사업가로서의 김두조
김두조는 아내 이휘향의 영향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수많은 자선 사업을 펼쳤습니다. 그의 가장 주목할 만한 행적은 2001년 한동대학교에 자신의 전 재산을 기증한 것입니다.
2001년 3월, 김두조는 30여 년 동안 수집해온 민속유물과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 일대 3,300여 평의 부지, 주유소, 온천, 모텔, 민속자료관, 역사사진관, 레스토랑 등 총 40억 원 상당의 재산을 한동대학교에 기증했습니다. 기증된 민속전시관에는 그가 30여 년간 수집해온 5,000여 점의 전·근대 희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역사사진관에는 18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사진 1,2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김두조는 청송 감호교도소 등 교정시설에서 위문공연을 펼쳐 법무부 장관 표창을 세 차례나 받았습니다[1][5]. 이런 공로로 그는 사회봉사자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유퉁과의 특별한 인연
김두조의 삶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관계는 배우 유퉁과의 인연입니다. 유퉁은 김두조를 "평생 존경해온 스승이요,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젊은 시절 방황하던 유퉁은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주먹왕'이라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김두조를 찾아갔고, 그때부터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김두조의 권유로 유퉁은 1984년 '라운드 보이'라는 연극에 출연하며 배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김두조가 세상을 떠난 후, 유퉁은 자신의 집 옥상에 게르(몽고인의 이동식 집)를 지어 '추모의 방'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에는 김두조의 사진과 편지가 걸려 있고, 유퉁은 그곳에서 홀로 향을 피우고 묵념하며 김두조를 기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간과 유산
김두조는 2005년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지만, 이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병세가 악화되자 포항 복싱 체육관을 트레이너에게 넘겨주는 등 주변 정리에 나섰고, 결국 2008년 9월 6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고 최대한 조용히 장례를 치러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휘향은 남편의 뜻에 따라 50일 동안 해인사에서 생활하며 그의 마지막을 함께했습니다.
이휘향은 후에 남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좋은 사람이었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다.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도와준 하늘에게 감사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결론
김두조의 삶은 한 인간이 어두운 과거를 극복하고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낸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포항의 건달에서 시작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인생의 방향을 바꾸고, 성공적인 사업가와 가수가 되었으며, 결국은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그의 삶은 진정한 개과천선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그는 정치인 박찬종이 표현했듯 "정의로운 이 시대의 마지막 야인"으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어려운 이들을 도왔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김두조의 삶은 인간의 변화 가능성과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본보기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