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거래(歸去來)는 중국 동진 시대의 은거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개념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을 넘어서 세속적 권력과 명예를 포기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철학적 태도를 함의하며,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이상적인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한국의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는 적절한 때에 관직에서 물러나는 미덕으로 인식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권력에 연연하지 않는 고결한 품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활용되고 있다.
귀거래의 어원과 기본 개념
귀거래라는 표현의 핵심은 '돌아간다'는 의미의 '귀거(歸去)'와 무의미한 조사 '래(來)'가 결합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이 표현은 도연명이 팽택현령 관직을 사임하며 지은 '귀거래사'의 첫 구절인 "귀거래혜(歸去來兮)"에서 직접 유래되었다. 여기서 '혜(兮)'는 감탄사로, "자, 돌아가자"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귀거래의 개념적 의미는 단순한 지리적 이동을 넘어선다. 이는 관직이나 선출직 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행위를 지칭하지만, 동시에 세속적 욕망과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본래의 자연스러운 삶으로 돌아가려는 철학적 의지를 표현한다. 특히 공직이나 선출직 자리에서 물러날 때 주로 인용되며, 권세 있는 자리일수록 귀거래가 회자되기 십상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개념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권력에 대한 특별한 철학적 태도를 반영한다. 즉, 권력은 일시적이며 영원하지 않다는 인식과 함께, 적절한 때에 스스로 물러날 줄 아는 지혜를 중시하는 문화적 가치관을 보여준다. 이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은 없다)"이라는 표현으로도 설명되며, 언젠가는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는 자연의 섭리를 인정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그 배경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사는 405년 그가 41세가 되던 해, 마지막 관직인 팽택현령을 사임하면서 지은 산문시이다. 이 작품의 창작 배경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누이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관직을 버렸다는 설과 함께, 중앙에서 내려온 감독관에게 자존심을 굽히고 의전을 해야 하는 관례를 참을 수 없어 사직했다는 설이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다섯 말의 쌀을 얻기 위해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는 그의 유명한 말로 표현되는 선비다운 기개를 보여준다.
귀거래사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관직 생활에 대한 후회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결심을 표현한다. "귀거래혜(歸去來兮), 전원장무호불귀(田園將蕪胡不歸)"로 시작되는 이 부분은 "돌아가자,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라는 의미로, 자연으로의 회귀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낸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과 집에 도착했을 때의 기쁨을 묘사한다. "동복환영(僮僕歡迎), 치자후문(稚子候門)"에서는 머슴아이가 길에서 반기고 어린 아들이 대문에서 기다리는 정겨운 장면을 그려낸다. 이어서 "삼경취황(三徑就荒), 송국유존(松菊猶存)"을 통해 뜰의 세 갈래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여전히 꿋꿋하게 남아있다는 자연의 불변성을 노래한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은거 생활의 즐거움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를 성찰한다. "부귀비오원(富貴非吾願), 제향불가기(帝鄕不可期)"를 통해 부귀는 자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며, 신선이 사는 땅은 기약할 수 없는 일이라고 표현하며 현실적이면서도 초월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마지막 구절인 "요승화이귀진 낙부천명복해의(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에서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돌아갈 뿐, 하늘의 뜻을 즐겨 받드니 무엇을 의심하고 주저하랴는 달관의 경지를 드러낸다.
한국 문학과 문화에서의 수용
귀거래사는 조선시대 한국의 선비들에게 선비정신의 한 표상으로 칭송받았으며, 많은 문학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농암 이현보(李賢輔)의 시조 "귀거래 귀거래하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직접적으로 본받아 창작된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시조는 이현보가 일흔의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주상별연에서 취중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효빈가(效嚬歌)'라고도 불린다.
이현보의 시조는 "귀거래 귀거래하되 말뿐이오 가는 이 없어 / 전원이 장무하니 아니 가고 엇지 할고 /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명 들명 기다리나니"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초장에서 사람들이 귀거래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행하지 않는 세태를 비판하고, 중장에서 전원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인식하며, 종장에서 전원생활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귀거래는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적당한 때 그만두고 낙향하는 귀거래가 선비의 조건으로 여겨졌다. 퇴계 이황 같은 경우 평생 열한 번이나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를 했으며, 그의 낙향을 읊은 시에 "백파(白波)를 가르고 떠난다"는 구절이 있어 이후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귀거래하는 것을 '백파를 가른다'고 표현하게 되었다.
한편 위선적인 귀거래도 존재했다. 세조와 성종 두 임금을 받들었던 한명회는 강 언덕에 압구정(押鷗亭)을 짓고 낙향했고, 중종 때 정승 심정은 소요정(消遙亭)을 짓고 사는 척 위선적인 귀거래를 했다. 당시 뜻있는 선비들은 이러한 사이비 귀거래들을 "정자는 있으나 그곳에 돌아와 쉬는 이 없으니 누구라 갓 쓴 원숭이라 일러 예이지 않으리요"라는 시로 풍자했다.
현대적 의미와 활용
현대에 들어서도 귀거래는 여전히 권력에서 물러나는 상황에서 자주 인용되는 표현이다. 2014년 제주도 지방선거를 앞두고 작성된 언론 기사에서는 우근민 도지사, 박희수 도의회 의장, 양성언 교육감 등이 모두 귀거래한다고 표현하며, 이들의 재임 중 공과는 자리를 떠난 후 평가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귀거래가 현대 정치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제적으로도 귀거래의 정치철학은 선진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워싱턴이 귀거래했고, 제퍼슨이 고향의 오크나무 밑에 하얀 집을 짓고 귀거래했으며, 영국에서도 이든, 맥밀런, 윌슨 수상 등이 귀거래를 했다. 넬슨 만델라 남아공 전 대통령은 귀거래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데, 그는 80%가 넘는 국민의 지지와 주변의 강력한 연임 권유를 뿌리치고 단임 대통령으로 물러나면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나를 키워준 계곡과 언덕, 시냇가를 거닐고 싶다"는 퇴임사를 남겼다.
현대 사회에서 귀거래는 단순히 정치적 은퇴를 넘어서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성찰과 진정한 가치의 추구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물질적 성공과 사회적 지위보다는 내적 평안과 자연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가치관과 맞닿아 있다. 이는 도시를 떠나 시골로 귀농하거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벗어나 소박한 삶을 추구하는 현대적 귀거래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결론
귀거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시작되어 동아시아 문화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린 철학적 개념이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닌, 권력과 명예에 대한 초월적 태도와 자연으로의 회귀 의지를 담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는 이상적인 정치 도의로 여겨졌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권력에 연연하지 않는 고결한 품성의 상징으로 활용되고 있다.
귀거래의 현대적 의의는 물질만능주의와 권력 지향적 사회에서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특히 "화무십일홍"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권력과 영화는 일시적이며 언젠가는 내려와야 한다는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지혜를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 사회의 지도층들에게 권력의 일시성과 책임감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나아가 귀거래는 개인적 차원에서도 삶의 우선순위와 진정한 행복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도연명이 "부귀비오원(富貴非吾願)"이라고 노래했듯이, 외적 성취보다는 내적 평안과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삶의 태도는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관으로 다가온다. 이는 귀거래가 과거의 유물이 아닌, 현재와 미래에도 지속될 수 있는 보편적 지혜임을 보여준다.